[박종국의 파워인터뷰-일렉토니스트 한지연씨]
듣고 음 맞추는 ‘절대 음감’ 소유자…신동이라 불리던 성장기
뛰어난 재능이 오히려 ‘독’…버거웠던 무명 피아니스트의 현실
반주자로 누구보다 바빴지만, 정작 자신의 무대 없었던 세월
일본에서 운명처럼 만난 일렉톤, 인생 2막 정상급 연기자로 '우뚝'
내달 23일 무료 콘서트…조연 아닌 주연으로 나서는 첫 무대


[충청매일 박종국 기자] 지난 14일 오전 찾아간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청주 한씨 여명회관’ 4층 연주실.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합주하는 듯한 웅장한 교향악이 울려 퍼졌다. 곱게 물들어 가는 도로의 은행잎과 절정을 이룬 우암산의 단풍과 어우러진 선율이 오케스트라 음악회를 여는 듯했다.
"일렉톤(Electone)이라는 악기입니다. 피아노는 물론, 관현악기와 타악기, 아시아의 전통 악기 등 세상의 모든 악기 소리가 나요. 합창단의 화음도 낼 수 있고요." 피아니스트 겸 일렉토니스트 한지연(53)씨는 "연주자 한 명이 오케스트라 연주를 할 수 있는 보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절대 음감’을 타고났다고 했다. TV에서 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음을 맞췄다. 주변에서 ‘신동’, ‘음악 천재’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그런 그를 7살 때 피아노 교습을 시켰다. 10살 때부터 교회 오르간 반주자로 나섰다. 청주대 음악교육학과 학사, 석사 과정을 마쳤지만, 독창적인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지 못했다.
뛰어난 재능이 오히려 독이었다. 악보 없이 모든 악기에 맞춰 반주하고, 성악가의 음높이에 맞춰 자유자재로 전조가 가능했으며, 2시간짜리 오페라 공연 반주, 연주자가 건너뛰는 부분을 티 안 나게 맞춰주는 것이 가능했던 그를 주변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대학 시절 각종 연주회와 음악회 반주자로 불려 다녔다. 청주의 한 맹아학교 학생들의 음악교사로 8년간 일했다. KBS 청주총국 어린이 동요 프로그램 전속 반주자로도 11년간 활동했다. 입시 지도를 했던 학생의 대학 실기 시험 반주자로 갔다가 반주자가 도착하지 않아 발을 동동거리는 다른 응시생을 악보 없이 즉석에서 반주해 합격시키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연주를 더욱 빛나게 하고,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선율을 내는 반주자의 역할이 좋았어요. 반주 요청을 매정하게 뿌리치지도 못했고요." 청주의 음악 동호인들과 함께 ‘더 클래식 오케스트라’를 결성, 병원과 요양원, 장애인 시설 등을 방문해 작은 음악회를 여는 재능 기부도 꾸준히 했다. 2023년 대한올림피언협회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그해 대한민국 국민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보조자 역할인 ‘반주 피아니스트’의 삶은 경제적으로 녹록지 않았다. "누구나 지나온 길을 후회하잖아요. 열심히 살아왔는데 음악인으로서는 아쉬움이 있죠. 이것저것 부업을 권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그 길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제 천직인 음악에 더욱 전념하기로 했죠"(웃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가 암으로 투병하고, 어머니를 뒷바라지하던 아버지가 병환으로 세상을 떴다. 온 세상이 무너진 듯 감내하기 힘겹던 2019년 일본 여행을 갔다 우연히 들린 야마하 본사에서 운명처럼 일렉톤과 마주했다. 수백, 수천 가지의 음색으로 천상의 소리를 내는 일렉톤에 흠뻑 매료됐다. 귀국하자마자 일렉톤 교습을 받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수시로 일본에 가 며칠, 몇 주를 머물며 연주법을 익혔다. 귀국해서는 새벽까지 일렉톤을 ‘갖고 놀았다.’
일렉톤은 야마하가 1958년 개발한 전자 오르간이다. 88개의 손 건반과 20개의 발 건반이 있다. 손을 놀리는 동시에 발로 함께 연주해야 하는 고난도 악기다. 한 명이 건반 악기,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까지 연주할 수 있다. "운명과도 같은 만남? 저에게 일렉톤이 그랬어요. 하늘이 저에게 ‘예비’해 준 악기인 것 같아요."
그랬다. 일렉톤은 연주는 물론 모든 악기들이 화음을 이룰 수 있게 하는 편곡이 중요하다. 30여년 반주자로 다른 악기들과 협연해왔고, 발을 써야 하는 오르간을 오랫동안 다뤘던 그의 교회 반주자 경험은 일렉톤 연주자로 최상의 조건이었다. 그가 입문 5~6년 만에 국내 정상급 일렉톤 연주자로 설 수 있었던 이유다.
코로나가 유행하던 2020년 방역이 엄격해지면서 오케스트라 공연이 막혔다. 악기 하나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일렉톤이 주목받았다. 러브콜이 잇따랐다. 지난 8월 이탈리아 성악가 빈센조와 세종시 예술의전당에서 이틀 동안 협연했다. 10월에는 서울 송파구의 ‘낭만 페스타’에서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멤버였던 발레리나 스테파니 춤의 연주를 맡아 호평 받았다.
한씨는 다음달 23일 청주예술의전당 대공연장 무대에 선다. 인생 최초의 독주회다. 국제 아동 NGO 기구 ‘위드 세이브 더 칠드런’과 함께 하는 무료 ‘자선 콘서트’다. 빈센조와 K-POP 걸그룹 블랙스완도 출연한다. "입장료를 받으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거절했어요. 첫 연주회를 모든 사람이 함께 즐겼으면 해요. 힘겹더라도 묵묵히 걷다 보면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걸 아는, 공감의 무대로 만들고 싶어요."
그는 평생 다른 연주자를 화려하게 빛나게 돕는 ‘조연 인생’을 기꺼이 감수해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첫 주연으로 서는 공연을 앞뒀지만, 설렘보다 걱정이 큰 눈치였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열리는 공연인데, 객석이 채워지지 않으면 어쩌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