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충청매일]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 위한 해와 바람의 내기에 대한 이솝우화는 매우 직관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교훈을 준다. 오히려 너무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이솝우화는, 그런데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은 차가운 바람처럼 우리를 거세게 몰아쳤다. 그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대학에서 처음 경험한 자유로움은 낯설고 어리둥절했으며, 젊은이들은 방황했다. 그렇게 방황하다 입대한 군대에서의 통제는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우리 사회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기성세대들은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으로부터 따뜻한 온정과 관심을 받아 본 경험이 거의 없다. “나랏일이니 당연히 따라야지, 정부의 얘기가 틀릴 일이 없어, TV와 신문에서 그들은 빨갱이고 공산당이라고 했어, 정부에서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라고 국가의 폭력을 스스로 합리화함으로써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과 관습에 따른 맹목적인 복종이었다.

1970~1980년대는 국가 제도라고 하는 거센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만 했던 시기였다. 불합리하고 억울한 것이 있어도 감히 나설 수 없었고, 우리 사회도 이러한 목소리를 수용할 여건이 아니었다. 그렇게 국가라는 폭력에 힘없이 당한 주민들은 한참 동안 여기저기 억울함을 호소하다가도 체념하고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런 고난의 시간들은 지역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고도 2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삶은 과연 달라졌을까?

2020년, 우리나라 국민의 수준은 어느 선진국 못지 않게 성숙해졌다. 기술 수준도 4차산업혁명의 시기로 접어드는 시점에 있다. 그런데 정작 국가 제도는 여전히 1970∼80년대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여전히 국가가 규제로 통제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대청호에 상수원보호구역이나 수질보전특별대책지역이 지정될 당시는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고 여겼다. 상류 지역에 사는 사람 한 명, 가축 한 마리, 벼 한 포기까지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에 기반하여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 규제 제도는 과연 성공을 거두었을까? 앞으로도 이런 국가적 통제는 지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규제중심의 상수원 관리는 초기 오염원의 증가를 억제하는데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0여 년의 국가적 통제는, 사실 무색하게도 자본시장과 정치적 힘 앞에 구멍이 숭숭 뚫려왔다. 지역주민은 제도에 순응하기 보다는 허점을 찾는데 더 집중했다. 거센 바람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지 못하듯이 국가의 강력한 통제는 주민의 자발적 환경개선 참여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팔당호는 지나치게 뚫렸고, 대청호는 너무 막혀서 소멸의 위기에 처했다. 일방적인 국가 통제의 허점이자 실패다.

시대는 변했다. 주민들의 의식도 높아졌고, 환경보호에 대한 참여 의지도 강하다. 따뜻한 햇살을 쬐어주면 스스로 외투를 벗고 상수원 보호에 앞장 설 준비가 되어 있다. 국가 주도의 규제를 풀면 위험해진다는 구시대적 발상을 버리고 성숙한 주민들의 집단 지성에 상수원의 관리를 맡겨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국민은 코로나19와 4·15 총선으로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다. 지역주민이 주도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상수원 관리제도를 대폭 개선해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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