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저녁 운전하다 산짐승 때문에 크게 놀란 경험이 있었다. 도로 옆에 있던 너구리 한 마리가 느닷없이 차로 뛰어 드는 것이었다. 워낙 황급히 당한 일이라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어이쿠! 무고한 생명 하나를 희생시키는구나!’란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마침 그곳이 차량속도를 억제하기 위한 요철(凹凸)시설이라서 아주 천천히 서행했다. 그래서인지 차바퀴 아래로 뛰어 들었는데 부딪히는 소리는 나질 않았다. 직감적으로 “후유! 죽지는 않았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요즘 같은 가을철이면 농촌에선 산 짐승 때문에 난리다. 멧돼지가 지나간 곳이면 뭣 하나 성한 게 없다. 산골짝에는 간간이 폭약 터지는 소리가 산천을 진동한다. 몇 년 전 남해안 어느 섬에서는 민가에 까지 내려와 염소를 잡아가는 사건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멧돼지가 소행이었다. 이는 육식동물이 멸종됨에 따라 멧돼지의 천적은 없어지고, 개체수가 증가됨에 따라 먹을 것이 찾아 민가를 덮친 것이다.

몽골에선 늑대를 매우 신성시한다. 그들 민족의 영웅인 징기스칸도 늑대에 비유한다. 늑대는 양과 말 같은 가축을 잡아먹고 산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늑대를 신성시하는가? 늑대는 수십 키로 밖에서도 양떼들 중에서 병들거나 부상당한 것을 정확히 골라서 공격한다고 한다. 병든 양을 골라서 잡아먹음으로 해서 전염병의 감염을 예방할 수 있으며,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 초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자나 치타 같은 육식 동물들이 제일 먼저 병든 것부터 공격하기 때문에 오히려 초식동물들은 더욱 건강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며 생태계의 순환이다.

그래서 관계 당국에선 한국형 토종 ‘늑대’를 복원하기 위해 고심 중에 있다고 한다. 미국의 국립공원에선 멸종되었던 늑대를 복원하여 자연으로 방사했다고 한다. 산토끼와 집토끼를 교배하면 새끼를 낳지 못한다. 그러나 개와 늑대를 교배하면 새끼를 낳을 수 있다고 한다. 산토끼와 집토끼는 유전자가 다르고 개와 늑대는 유전자가 같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늑대 대신 개를 산에다 방사하면 생태계가 복원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봤다. 전문가에게 알아봤더니 늑대와 개는 비록 유전자는 같지만 습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한다.

뭐가 다른가? 사람과 함께 살았던 개는 사람의 습성을 닮았고, 자연속에서 지냈던 늑대는 자연의 순리에 길들여져 있다. 사람이 가지는 욕망을 ‘사회적 욕망’이라 하고, 자연의 동물들의 욕망을 ‘자연적 욕망’이라 한다.

‘사회적 욕망’이란 인간의 끝없는 탐욕적 욕망을 말한다. 변증법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피지배 계급에서 지배계급으로 오르려는 강력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계급간의 투쟁으로 인류역사를 이끌어 왔다. 이에 비하여 ‘자연적 욕망’은 생명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교환적 욕망이다. 자연의 욕망은 댓가 없이 서로에게 서로를 베푼다.

여기서 늑대와 개가 확연히 구분 된다. 개가 ‘사회적 욕망’에 길들여져 있다면 늑대는 ‘자연적 욕망’에 길들여져 있다. 늑대는 먹을 만큼만 잡아먹는데 비해 개는 사람을 닮아서 그런지 초식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인다고 한다.

‘사회적 욕망’이 인간만이 가진 이기주의적 욕망이라면, ‘자연적 욕망’은 너와 내가 서로 공존하는 자리(自利) 이타(利他)적 욕망이라 하겠다. 

“고작 백 년 살면서도 만 년 살 것을 준비하는 게 인간의 욕심이란다.” 한량 없는 인간의 욕심! 그것은 지구의 생태계를 병들게 한다. “소욕(少欲) 지족(知足)하라! 작은 데 만족하라!” 이것이 바로 자연 생태계가 지향하는 자연적 욕망이다. 먹을 만큼만 먹고 포효(咆哮)하는 사자의 위용! 이제 우리는  욕망충족을 위한 투쟁일변도의 ‘사회적 욕망’을 지양하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공존하는 ‘자연적 욕망’에 귀 기울여 볼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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