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 충청매일 ] 2주 전 지난해 농사지은 들깨로 기름을 짰다. 기름이 얼마나 나올지 궁금했다. 한 해 전에는 너무 적어 읍내 방앗간 몇 곳은 그렇게 그 양으로는 기름을 짤 수 없다고 했다. 애써 지은 것인데 푸대접을 받으니 속이 상했다. 다행히 한 곳은 짜 주겠다고 하면서도 "엄청나게 많이 갖고 오셨네요"라면서 웃었다. 그때 나온 기름이 소주병으로 세 병 반이었다. 

 기름을 짜러 방앗간에 가기 전에 들깨를 물에 헹구어 일고 말려서 가면 바로 기름을 짤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서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비용도 더 든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그냥 갔더니, 방앗간 주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고, 기름을 다 짤 때까지 세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부지런한 농부라면, 늦가을 들깨를 거두고 나서 바로 그때 헹구고 일고 말려서 기름을 짰을 것이다. 미루면 쌓이고, 그것이 앞으로 가는 발걸음을 더디게 만든다. 농사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다 그렇다. 

 변호사를 하면서도 일을 미루다가 재판 직전에 어쩔 수 없이 하느라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능률도 떨어지는 경험을 종종 한다. 그러면서도 잘못된 습관을 확 바꾸지 못하니 업의 힘은 참으로 무겁고 무섭다. 

 기다리는 동안 아내와 함께 보청천 동다리를 건너 도서관에 다녀왔다. 동다리의 특징은 다리의 가운데 부분을 양 둑보다 높여 불룩하게 올라오도록 하여 홍수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하였다. 다리의 동쪽으로는 매미의 날개 무늬를, 서쪽으로는 거북 등 무늬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나름대로 괜찮게 여겨졌다. 

 그런데 ‘보은사람들’이라는 신문에서는 매미가 보은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밤에 조명을 밝힐 곳은 다리가 아니라 골목길 등이며, 당시 정상혁 군수의 치적을 위해 만든 것이라며 비판하였다. 이렇게 정 군수의 치적을 위해 만든 대표적인 것이 ‘정이품송 공원’이다. 

 속리산 복천암에서 공부한 신미대사는 한글 창제에 직접 관여한 사실이 없음에도, 보은군은 공원 조형물에 ‘창제의 주역’이라고 추켜세웠다가 논란이 일자 이를 지웠다. 

 다시 방앗간으로 오니 우리 들기름을 짜고 있었다. 다 짠 들기름을 식히면서, 주인은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할머니의 호두 기름 을 짰다. 그 할머니는 ‘젊은’ 우리 부부를 보고 ‘귀농했냐, 어디 사느냐’며 관심을 보였다. 이제 보은은 ‘젊은’ 사람이 참 귀한 곳이 되었다. 내가 사는 동네도 어르신이 한두 분씩 돌아가시면서 빈집이 늘고 있다. 지난해 12월 말 기준 보은군의 인구수는 3만1천10명으로 전년 대비 445명이 줄었고, 2023년 보은군의 출생자는 68명, 사망자는 501명이다. 인구소멸, 지역소멸이 눈앞에서 구체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이번에는 들기름이 9병 나왔다. 전년의 세 배다. 방앗간 주인에게 "기름이 나온 들깨가 한 말은 되겠냐"고 물으니, 작년에 익살스럽게 비웃던 표정과 달리 자못 진지한 얼굴로 "한 말 가웃은 된다"고 하였다. 

  작년의 수모를 이기기 위해 농사 면적을 늘렸는데 성공한 셈이다. 거름으로 쓰기 위해 깻묵 한 자루까지 사서 들기름 9병을 들고 나오는 마음이 뿌듯하긴 했지만, 자꾸만 썰렁해져 가는 마을 분위기에 가슴 한쪽이 시렸다. 앞으로 우리 동네는 어떻게 될까. 두 달 전쯤 나와 꽤 친하게 지내다가 돌아가신 노인회장님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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