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 충청매일 ] 오래전, 중앙지검에서 검사로 근무하다 변호사로 개업한 분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술 한잔 나누는 자리에서 그는 사법고시 준비할 때 운동권 학생들에게 늘 미안함을 안고 살았다고 했다. 엄혹했던 시대를 종식하는 데는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했다. 대학생들이 그 역할을 했다. 이후 그는 여러 시민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했고, 후원회도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을 봤다. 정직하고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다.

 1988년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같은 대학 다니는 고향 선배가 찾아왔다. 자취방에서 술 한잔하며 시국 이야기를 꺼냈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선배의 방에는 시집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서적이 즐비했다. 밤새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겐 썩 와 닿지 않았다. 남북문제, 경제 불균형, 군사독재 등 고등학교 시절 들어보지 못한 많은 말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상심한 듯한 선배의 표정을 보며 자취방을 나섰다. 그때도 누군가는 건물 위에서 뛰어내리고, 변사체로 발견되는 학생도 있었다. 

 나는 운동권이 아니다. 강의실로 가는 길, 수많은 대자보를 보고도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지나쳤다. 학교 정문에는 학생들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체류탄이 터지면 매콤한 연기에 연신 눈물 콧물을 흐리며 그곳을 지나갔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잘게 쪼갠 보도블록과 화염병을 전경들 속으로 던졌다. 일상처럼 봐 왔던 거라 신기하지도 대수롭지도 않았다. 그땐 그랬다.

 대학 생활하면서 조금씩 바뀌어 갔다. 전교조 출범식에도 참여했고, 화염병을 안 던져도 대열에 끼여 구호도 외치고 유인물을 가방에 담아 나눠 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의식화 교육을 받거나 누군가의 지령을 받지도 않았다. 자연스러운 문화처럼 여겼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해서도 책을 읽어 알게 되었고, 사회변화에 대한 자연스러운 발로였다.

 세월이 흘러 나는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맘 한쪽에 운동권 학생들에게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개인의 영달이 아닌 공익적 생각으로 한 그들의 행동이 돌이켜 볼수록 대단했고, 함께 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운동권 학생 중 소수가 정치권에 몸을 담고, 얼마는 시민운동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다수는 평범한 시민의 삶을 살고 있다. 난 지금도 10여 곳의 단체에 월 만 원씩 회비를 내고 있다. 나는 못하지만,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 

여당 대표는 총선의 시대정신으로 586 운동권을 청산을 주장하고 있다. 검사 한 분은 미안함을, 다른 한 분은 청산을 주장하는 모순된 지점에서 묻고 싶다. 백골단이 대학 캠퍼스를 짓밟고, 학생들이 강제 연행될 때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타고난 머리와 노력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위에 오른 두 사람의 인식의 차이를 무엇으로 설명할까. 행사에 빠지지 않는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의 의미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자유를 위해 헌신한 누군가의 희생을 기리기 위함이다. "나는 지금의 당신이 하는 말 중에 한마디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의 깊이를 되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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