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드디어 때가 되었다. 이사 오기 전부터 제일 걱정이던 것이 나무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었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며칠 동안 검색해 가며 고민하던 중이다. 수은주가 곤두박질하는 매서운 날씨인데도 집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없어 다행이다.

작달막한 키에 까까머리 중학생처럼 잔가지 하나 없이 말끔한 이웃집 대추나무를 보다가 손질을 하지 않은 우리 대추나무를 보니 가관이다. 남의 입에 오르내릴까 남세스럽다. 얼른 톱과 전지가위`를 들고 실전에 들어갔다.

웃자랐던 잔가지들이 마치 고양이 수염처럼 삐죽삐죽 뻗었다. 가운데 우뚝 하늘로 향한 제법 굵은 가지부터 톱으로 자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충격에 고통의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잘린 가지가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마치 팔뚝이 잘려나가듯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었다. 햇빛을 골고루 받고 통풍이 잘되게 하려면 어쩔 수 없다. 헌신하는 자의 희생이다. 이번에는 수염을 깎듯 잔가지를 톡 톡 잘라냈다. 이미 말라버려 생명의 흔적이 없는 것도 있다. 내 키 높이 만큼 낮아진 대추나무가 말쑥해졌다.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모두 벗어버렸다. 바라볼수록 초보자의 솜씨가 스스로 대견하다.

대추는 해마다 새로운 가지에서 열매를 맺는다. 해묵은 가지를 모두 잘라내야 한다. 한 해 동안의 영광도 고단함도 모두 떨구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환골탈태다. 결실의 순간도 있었겠지만 아팠던 지난 상처를 모두 지울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좋았던 일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괴롭고 힘들었던 일들은 뼛속까지 사무쳐서 자꾸 곱씹게 된다. 잊을 것은 잊으라지만 그게 어디 내 뜻대로 되는가 말이다. 고통의 순간은 완전히 사라졌다 해도 허물이라는 부스러기를 만들어 낸다. 누구에게나 허물은 있다. 그것은 마치 눈에 들어간 티와 같아서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허물까지 모두 벗어버릴 수 있다면 매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그렇다면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내가 잘못인 줄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죽을 때까지 가져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매번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허물을 벗지 못한 죽음 뒤의 내 모습을 상상한다. 평생 몰랐던, 생전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자신을 저승 가는 길에 뒤돌아보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사과할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을 것 아닌가. 대추나무의 벗어버린 허물은 다시 거름이 되듯이 사람도 잘못을 알면 그 허물마저 존재의 거름이 된다.

비워내야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다고 했으니 잘려나간 자리에서 다시 새순이 돋을 것이다. 툴툴 털고 다시 일어설 대추나무가 부럽다. 초보자의 실력이기에 혹시 대추가 하나도 열리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도 된다. 하지만 오늘 한 가지치기가 대추나무에 상처가 아니라 채움을 위한 준비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내가 만든 또 하나의 허물이 아니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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