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칼럼]애국선열의 항일투쟁 재조명
[이정식 칼럼]애국선열의 항일투쟁 재조명
  • 충청매일
  • 승인 2021.03.2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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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솔문학작가회
수필가

[충청매일]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했다. 3·1운동이 흘러간 100년 전 역사지만 그것이 오늘날 우리 헌법에 법통을 이어온 정신적 지주였다. 국권을 상실하게된 것은 구한말 개화문명의 시대흐름을 거부한 조선왕조의 갈등과 권력투쟁에 있었다.

나라의 힘이 없어 일제의 강압으로 투쟁 한번 못하고 을사 보호조약(1905) 한일 합병조약(1910)을 맺어 국권을 상실했던 치욕 이었다. 5천년 역사에 이렇게 협박에 의해 국권을 상실한 적이 있었는가. 나라 잃은 한민족의 분노는 1919년 3·1만세 운동으로 폭발했다. 3·1만세 운동은 비폭력 평화적 시위였다. 전국 방방곡곡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일본은 총검으로 잔인하게 진압했다. 그래서 3·1만세운동 하면 상징처럼 떠오르는 것이 목숨 걸고 항거한 유관순 열사가 있었다.

국권이 상실되자 애국지사 들은 중국 상하이에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일제의 강제 점령을 거부하고 국내외를 통활 통치했던 3권 분립의 민주공화정부를 수립 항일 운동의 요새가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한국 국권 찬탈에 원흉인 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 하얼빈역에서 동양평화를 외치며 권총 사살하는 통쾌한 의거가 일어났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도쿄에서 일본 천황의 마차에 폭탄을 던져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중국을 침략한 일본의 승전 기념일에 단상에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국 대장 거류민 단장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고위 인사 10여명에 중상을 입혔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임시정부는 중국의 군사적 재정적 지원과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러한 애국의거 이면에는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 선생이 있었다.

국내에서 일본의 탄압이 점차 강해지자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애국 국민들은 국경을 넘어 북간도.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와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장차 독립전쟁을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1919년 8월 김좌진, 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은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1919년 8월 이후 의병장 출신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그 유명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대승을 한 것도 나라 잃은 한 맺힌 승리였다. 1920년 10월 21일 이범석과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1천600명의 독립군의 청산리 계곡의 전투에서 침투하는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한 1천200여명을 사살하는 청산리 대첩의 대전과를 올렸다.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매복작전과 빠른 기동력·위장전술에 있었으며 나라 잃은 원한으로 똘똘 뭉친 단결력 이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단생산사(團生散死)라는 말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병사들에게 강조했던 말이다. 해방 후 신탁통치의 찬반으로 국론이 분열되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대국민 호소를 했던 말이다. 우리는 코로나 국난을 당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 경제전망도 암울한 긴 터널을 지내고 있다. 4대 강국과 미·중 갈등 속에 어느 때 보다 국론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살신성인의 애국지사·선열들이 남긴 유훈을 깊이 새겨 갈등과 분열의 국난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으로 통일조국을 이룩해야 할 사명에 우리 모두 하나로 뭉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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