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칼럼]3·1만세운동과 유관순 열사
[이정식 칼럼]3·1만세운동과 유관순 열사
  • 충청매일
  • 승인 2021.03.1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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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솔문학작가회
수필가

[충청매일] 구한말 흥선 대원군의 쇄국(鎖國)정책과 고종의 개화(開化) 정책의 대립, 대원군과 민비와의 권력투쟁에 청국과 일본, 러시아를 끌어들여 주권을 외세에 의존하는 망국의 길을 열어왔다. 그래서 조선은 청국과 일본의 전쟁터가 되고 승리한 일본은 흔들리는 왕정(王政)을 강압으로 경술국치의 한일합병조약(1910년 8월 29일)을 체결하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식민화 야욕을 위해 입법, 사법, 행정, 외교. 군부 통수권까지 거머쥐고 무력통치로 우리 국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때마침 세계 1차 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이 나고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발표하는 국제정세 속에 3·1만세 저항운동은 급물살을 탔다. 한국의 유학생 600여명이 일본의 수도 동경 한복판에서 2·8 독립선언을 하고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선포하여 우리 민족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고, 국내에서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 지도자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한다. 하여 한 민족은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세계만방에 선언했다.

3·1만세운동의 상징처럼 떠오르는 유관순 열사는 충남 천안 병천 출생으로 유종권씨의 5남매 중 둘째 딸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 16세의 소녀였다. 학교장의 강한 만류에도 담을 뛰어넘어 파고다공원, 서울역의 만세운동 대열에 참여했다.

3월 10일 휴교령이 떨어지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학교와 교회를 찾아다니며 4월 1일(음 3월1일)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아우내(병천) 장날 장터에는 3천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열사는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의 총검에 부모가 모두 즉사하고 유관순 열사는 주동자로 체포되어 공주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열사는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혹독한 고문으로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다. 고문의 후유증과 굶주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경 서대문 감옥에서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는 초지일관 독립만세 의지를 굽히지 않은 한국의 ‘잔 다르크’로 불렀다.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에 국가보훈처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했다.

2021년 3·1운동 102주년을 보내며 우리국민에게 시사 하는 바는 무엇일까?

첫째,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동북아 4대강국의 패권 경쟁 속에 한반도의 남북 분단국인 한국의 위기는 항상 존재한다. 미중 갈등과 북핵 도발 위기를 벗어나려면 나라 지키는 힘을 길러야한다.

둘째, 통합·정의·비폭력의 3·1정신은 과거100년 우리민족을 살아 있게 한 생명이요, 향후 100년의 미래를 밝혀 줄 등불이다. 과거 뼈저린 3·1운동의 상처를 거울삼아 민주와 시장경제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온 국민이 뭉치는 것이다.

셋째, 온 나라가 코로나19로 큰 재난을 격고 있다. 경제전망도 불투명하다. 우리 모두는 3·1정신을 거울삼아 분열과 갈등을 넘어 서로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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