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국민학교시절 호암지는 놀이터였다. 겨울이면 썰매를 타기도 하고 얼음판 위로 걸어 들어가 불놀이도 했다. 종종 낚시도 했다. 손바닥만한 붕어를 잡아 매운탕 좋아하시는 아버님과 함께 먹은 적도 있다. 어느 날 호암지 언덕에 사는 연지네 집 앞에서 낚시를 하게 됐다.

“일선아 엄니가 오래?” 해서 따라 들어가니, 당원을 넣어 만든 국광잼과 개떡을 담은 쟁반이 놓여 있었다. 꿀보다도 달게 먹었다. 늘 1등인 연지는 도맡아 상을 타 부러움을 샀다. 중학생 땐 달천으로 이사 가서 호암지도 연지도 잊혀졌다.

고3시절 교실 창문에선 호암지가 잘 내렸다 보였다. 수양버들 휘휘 늘어진 꽃피는 춘삼월에 뱃놀이하는 연인들을 보면 한 없이 부러웠다. 수업시간에 넋 잃고 바라보다가 지적받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쁜이와 함께 저렇게 배를 탔으면 하는 장미 같은 꿈을 저마다 가슴 속에 피우며 감옥 같은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사춘기적 일탈은 교회를 통해 그나마 가능했다. 학생회 지도교사는 정수연 선생님이셨다. 나이 차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가끔은 누나라고도 살포시 부를 수 있었다. 간호대를 다니던 누나를 토요학생예배 때마다 보는 것은 설렘 자체였다.

어느 날 모두가 졸라서 예배 후 호암 딸기농장에 간 적이 있다. 빨간 등 아래 누나 얼굴은 딸기보다도 고왔다.

후일 지도교사였던 상배형도 이 곳에서 한통 냈다. 기분파인 그 형은 대학에서의 연애담을 풀어 놓아 딸기보다도 더 달콤하게 들었다.

호암지를 돌 때 마다 그런 추억이 되살아난다. 도로확포장으로 굴곡진 아름다운 호암지는 적잖게 모습을 잃었다. 연지네 집을 비롯해 언덕에 있던 집들은 모두 철거됐다. 서측 커피숍에서 충혼탑과 호암지를 돌아가는 삼거리에 있던 버드나무집도 헐리고 소공원이 됐다. 물레방아집도 헐리고 돌의자와 무대가 주인이 됐다.

도심재생이 화두인 이때 호암지를 어떻게 가꾸는 것이 좋을까? 추억이 쌓인 오솔길이 여기저기 있는데 또 길을 내야 하나? 주변에 있던 집 몇 채는 살려 휴식형 작은 도서관, 호암지 역사관, 게스트화우스로 활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잊혀 진 역사도 되살려야 하건만, 과거를 머금고 있던 건물들을 없애기만 하는가?

숲이 부족한 이곳에 나무를 심어야 하는데, 과한 조명으로 눈을 피로하게 하고 마음마저 현란하게 하는가? 자연에 대한 고민도 부족하다.

호암지는 사직산과 충주천, 대림산과 달천을 연결하는 도심생태축의 핵이 돼야 한다. 수변(水邊)토지를 매입해 공원을 넓힌 것은 잘한 일이다. 호수면(湖水面)과 우·아래 호암지 통수(通水)공간을 확대해야 한다.

생태공원사업을 할 때마다 왜 생태를 악화시킬까? 과거를 모르는 용역사와 공간에 담겨진 시간을 우습게 아는 공무원들 머리로만 그리지 마시라. 호암지를 누릴 이는 바로 시민이다.

근대사 스승 김영호옹과 정자나무 아래에 앉았을 때, 사진 몇 장을 받았다. 호암지를 설계한 일본인 손자로부터 받은 것을 건네 주셨다. 재일 일본인 충주향우회 ‘계명회보’도 받았다. 언젠간 그 후손들을 만나 자료를 얻고, 사연도 기록하고 싶다. 그 후손들을 호암지로 초청해 해원상생굿판을 열어 평화를 노래하고 싶다.

결코 호암지를 빼곡히 채운 저 현란한 조명이 행복을 밝혀 주지 못한다. 공간에 어린 시간을 뽑아내고 분칠하는 개발은 앙꼬 없는 찐빵만도 못하다.

올해엔 연지를 품고 ‘노들강변 봄버들’을 흥얼대며 노 저으련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