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대행수 어른, 지금 저들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자금을 좀 대주시는 것이…….”

박노수가 조심스럽게 최풍원의 의향을 물었다.

“으흠.”

최풍원도 쉽게 결정을 내릴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농민들의 도회는 불법이었다. 불법 정도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모반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그런 무리들에게 자금을 댄다는 것은 곧 자신도 반역에 동참하는 행위였다. 그렇다고 고을민들이 여는 도회를 방관만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도회가 열리고, 관아에 등소를 해서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모르겠지만, 십중팔구 청풍관아에서는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다. 고을민 알기를 천한 일벌레쯤으로 여기는 조관재 청풍부사가 그들이 요구하는 사안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러면 농민들은 관아로 몰려갈 것이고 성난 농민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 지도 모를 일이었다. 북진여각도 그런 혼란 속에서 무사하리라고 장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북진여각을 일구고 이끌어오면서 만의 하나 고을민들에게 원성을 살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북진여각도 농민들의 봉기에서 안전할 수만은 없었다.

최풍원도 머리가 복잡했다. 북진여각은 나날이 쇠락해가고 한양 삼개상전에 생긴 수적 문제로 봉착했던 어려움을 이제 겨우 수습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북진에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킨다니 쉴 틈 없이 일어나는 악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최풍원은 무슨 수를 쓰든 이번 소낙비도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청풍관아에서도 모르게 농민들의 도회에 뒷돈을 주어 환심을 살 수 있는 묘책을 찾아야 했다. 농민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일을 도모해야 했다. 최 행수는 급히 오슬이를 한양의 삼개나루로 보냈다. 봉화수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③ 최풍원 농민 항쟁에 뒷돈을 대다

최풍원은 벌써 여러 날을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온갖 풍상을 겪으며 인고의 세월을 넘어온 최풍원이었지만 이제 북진여각도 운명을 가름할 기로에 놓여 있었다. 며칠 전 농민도회소로부터 전갈이 왔다. 아직은 뚜렷한 투쟁방법이 정해지지 않아 회합만 거듭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터질 화약고였다. 농민도회소에서는 최풍원의 북진여각에 동참을 권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풍원의 입장에서 드러내놓고 농민도회소에 참가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북진여각의 상권의 명성이 옛 이야기로 흐르고 그나마 예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청풍관아의 공물과 세곡 덕분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조관재 부사는 제 욕심만 차렸다. 남이야 굶어죽든 말든 제 뱃속만 채우면 그만이었다. 이제는 관속들까지 대놓고 최풍원에게 손을 벌리니 관아와의 거래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속 빈 강정이었다. 공납을 하고나도 실리를 따져보면 남는 것이 별반 없었다. 그렇다고 무 자르듯 단숨에 관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최풍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농민봉기에 참여한다면 역모로 몰릴 터이고, 관아의 눈치를 보느라 농민도회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난리가 터졌을 때 북진여각이 그들의 첫 표적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어찌해야 될지 신통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날은 또 밝아오고 있었다. 동쪽의 월창에서 연화 꽃살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연꽃이 만개될수록 방안이 환해지며 미닫이에 꽃잎들도 되살아났다. 문고리 언저리에 정갈하게 붙여진 꽃잎들은 지난 늦가을 숙영이가 친정에 다니러왔다가 문을 바르며 솜씨를 부리고 간 것이었다. 최풍원은 꽃수를 문살에 붙이던 숙영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참동안 상념에 젖어 있었다.

“안채에 가서 작은 서방님 좀 오라구 하그라!”

최풍원이 별채 마당에서 비질을 하고 있던 칠만이에게 말했다. 칠만이가 일각문을 넘어 안채로 사라졌다. 한참 후 봉화수가 별채로 들어왔다.

“봉 서방, 지금부터 내 얘기를 잘 듣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농민도회소를 자네가 다녀오게!”

“도회소를요?”

“그들한테 돈을 좀 내놓아야겠네.”

“예에?”

최풍원의 말에 봉화수가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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