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이들 경강상인들이 저지르는 패악 중에서도 가장 악의적인 것이 ‘고패’였다. 고패는 곡물을 미리 빼돌리고는 배를 고의로 침몰시켜 횡령을 은폐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세곡을 운반하던 배가 침몰하면 물에 잠겼던 쌀은 그 세곡을 냈던 지방관아에서 정상적인 쌀로 교환해 주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경강상인들은 이러한 허점을 노려 침수된 쌀의 교환 비율을 날조하여 곡식을 다시 받아냈다. 결국 고패는 농민과 조정 모두에게 피해를 입혔으니 비리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방법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런 악의적인 방법을 뿌리 뽑기 위해 강력한 방지책을 내놓았지만 경강상인들의 수법이 날이 갈수록 교묘해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경상들의 교묘한 술수와 대궐의 높은 벼슬아치와 관아 관원들의 권력까지 합세해 나라의 세곡을 착복하는 수법은 나날이 기승을 부렸다. 그만큼 나라 살림은 물론 백성들의 생활은 쪼들렸다.

그런데 지금 조관재 부사가 최풍원에게 구휼미를 착복하기 위해 고패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싫다?”

조관재 부사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구휼미는 나랏님이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내리신 곡식인데 그걸 저보고 고패시키라 말씀하시옵니까? 저 같은 장사꾼 놈은 목이 백 개라도 남아나지 못할 일이옵니다. 저는 못하옵니다!”

최풍원이 또다시 거절을 했다.

“못한다!”

“만약 이 일이 발각되면 부사님부터 모두가 줄줄이 목을 내놔야 할 일입니다요!”

“그런 위험한 일을 아무런 방책도 없이 하겠는가? 이 일의 뒷배에는 한양 권 대감이 있네. 그래도 못하겠는가?”

“하도 어수선한 세상이라, 누굴 믿겠사옵니까? 광대 줄타기보다도 더 아슬아슬한 시절이옵니다.”

“그러니 뒷일은 내 책임진다고 하지 않는가?”

“글쎄…….”

최풍원이 머뭇거렸다.

“내 지난 번 빚진 것도 있고, 구휼미 삼천 석 중 천 석은 최 행수가 알아서 처분하시게!”

조관재가 큰 미끼를 던졌다.

구휼미 삼천 석 중 일천 석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순간 최풍원은 갈등을 느꼈다. 지금 북진 쌀값은 섬 당 스무 냥을 호가하고 있었다. 워낙에 흉년이라 쌀값은 더욱 폭등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처분한다 해도 최풍원에게 넘겨준 구휼미를 팔면 이만 냥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구휼미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남의 목숨 줄을 빼앗아 내 목숨 줄을 잇는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욕심도 생겼다. 잠시 부끄러움만 참으면 이만 냥이라는 거금을 쉽게 얻을 수 있고 그만한 돈이면 빚에 허덕이고 있는 북진여각의 형편에 가뭄에 단비처럼 큰 힘이 될 터였다. 최풍원의 마음속에서 종잡을 수 없는 갈등이 일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적도 기본 도리가 있고, 장사꾼에게도 최소한 지켜야 할 도리가 있었다. 그 도리를 벗어나면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어찌해야할지 최풍원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지만 욕심이 최풍원의 결단을 가로막고 있었다.

결국 최풍원은 쌀 일천 석을 선택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위했다. 자신이 그 일을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할 것이기에 그렇다면 자신이 그 일을 하고 여각에도 보탬이 되는 게 낫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최풍원은 마음이 좀 편해졌다. 하지만 찜찜함은 어쩔 수 없었다.

“고패한 구휼미는 청풍관아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한양의 용산으로 싣고 가면 곡물상 객주가 기다리고 있을 걸세!”

“알겠사옵니다요. 사또 뜻대로 하겠습니다요.”

최풍원이 조관재 청풍부사의 음모에 동참하기로 하고 이천 이포나루에서 구휼미를 선적하고 북진나루 앞 강심에 닻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후였다. 십여 척의 조운선에는 강가에서 보아도 곡식 섬이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고을민들은 구휼미가 그득하게 실려 있는 배들을 바라보며 쌀을 배급받아 식구들과 배불리 먹는 상상을 했다. 배에 실려 있는 곡물 섬만 보아도 고을민들은 배가 부르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귀신도 모르게 감쪽같이 해치울 자신이 있는가?”

배를 정박시켜놓고 관아로 들어간 최풍원에게 조 부사가 물었다.

“심려 놓으소서.”

“고을민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서 하시오!”

조관재가 다시금 다짐을 받았다.

“철저하게 채비를 해 놓았습니다요!”

최풍원이 조 부사를 안심시켰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