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우리가 활의 종주국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살짝 짚고 가겠습니다. 제가 처음 활을 배웠을 때 국궁계에 전설처럼 떠도는 말이 있었습니다. 즉 한 유럽인이 터키 활이 최고인 줄 알고 찾아갔다가, 몽골 활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몽골로 갔는데, 몽골 사람들이 한국 활이 더 우수하다고 해서 한국에 와서 활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런 전설이 있으려니 하고 말았는데, 2000년 무렵에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전설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카를 짜일링어(Karl Zeilinger)였습니다.

온깍지궁사회 회원 중에 서울 황학정 소속의 성순경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평생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한 분이라서 우리말보다 외국어, 특히 영어를 더 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짜일링어가 이분을 따라서 우리와 닿은 것입니다. 만나서 확인해보니 이 전설이 실제로 그랬습니다. 카를은 보청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의 지멘사 사원이었습니다. 이분이 터키 활을 접했다가 몽골을 거쳐서 한국까지 온 것이고, 한국 활을 직접 배워서 황학정에 정식으로 입사하였습니다.

카를이 얼마나 한국 활을 사랑했는지 1년에 두 차례씩 한국에 와서 1달간 머물며 전국의 궁장과 시장을 찾아다니며 취재하고 녹화하고 자료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독일 그의 집에는 박물관을 차리고도 남을 수많은 활 자료가 쌓였습니다. 이것을 한국의 한 박물관에 값싼 값으로 팔려고 목록까지 작성했는데, 그 작업을 도와준 성순경 명무에 따르면 유물 수가 수천에 이르렀고, 카를이 그것을 사기 위해 들인 돈도 몇 억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번은 서울 황학동의 벼룩시장에 옛날 각궁이 나왔는데, 그게 진품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어서 살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라면서 성 명무를 통해 저에게 진품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고자목의 때깔이며 활이 휜 각도나 정도를 가지고 진품과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준 적도 있습니다. 활에 관심이 많기에 온깍지궁사회 모임이라면 어디든 찾아와서 우리와 어울렸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런 관심과 정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2014년 4월에 황학정에서 활을 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아서 유가족이 없었고, 그럴 경우 독일 법에 따라 유산은 국가로 귀속된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평생 모은 활 관련 자료였습니다.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경매를 통해 그의 유품은 산산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그의 절친한 동료였던 성순경 명무도 2년 뒤에 입산(죽음을 활터에서는 이렇게 표현함.)하였으니, 이 무슨 희한한 일인지 우리는 황망해 했지만, 저승길이 외롭지는 않았겠다는 것으로 그나마 위안 삼았습니다.

카를에게 받은 명함에는 ‘Karl Zeilinger’ 밑에 한자로 ‘蔡林巨’ 한글로 ‘칼 자일링거’라고 쓰여서 그의 의견을 존중한 저는 한 동안 칼 자일링거라고 말하고 썼습니다. 그렇지만 이 알파벳 표기는 독일어로 ‘카를 짜일링어’라고 읽어야 한다는 독일 교포 김정래 접장의 조언에 따라 지금은 독일말로 읽어줍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 활을 사랑했던 짜일링어, 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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