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일본 얘기가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하고 가겠습니다. 제가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의 회인중학교에 한 5년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회인은 아늑하고 작은 마을입니다. 점심시간에 산책을 나가서 마을을 한 바퀴 돌면 20분 정도가 걸립니다. 점심 후 산책 코스로는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 오일장이라도 서는 날이면 발걸음이 절로 느려집니다.

후문으로 나가서 초등학교 담장을 따라가면 학교 밑에 기와까지 얹은 아름다운 돌담이 있고, 담쟁이가 용처럼 감싸 안은 그 돌담 안에 회인현의 내아 건물이 있습니다. 즉 현감의 생활공간이죠. 요즘으로 치면 관사 같습니다. 그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그 집 주인 어르신은 사명감을 갖고 그 기와집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고 합니다. 초등학교 앞까지 연결된 돌담은 무너질 때마다 그 할아버지가 손수레로 돌을 실어 날라서 고치곤 합니다. 그래서 사진작가들이 곧잘 찾아와 찍는 명당자리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산책을 나갔는데, 돌담 허물어진 곳을 그 할아버지가 고치고 계십니다. 저도 거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집으로 들어오라더군요. 그래서 아름드리나무를 잘라서 만든 기둥과 들보를 보고 감탄하며 할머니가 건네준 음료수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자랑을 하십니다. 한 10여 년 전에 일본사람이 1년간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고 갔다, 는 것이 그 자랑의 요지였습니다. 뭐 하는 사람이었느냐고 물었더니 단순히 회인을 연구하는 학자였고, 박사학위 주제로 회인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일본인이 주고 갔다는 자료를 몇 가지 보여주는데, 옛 회인현 지도를 비롯하여 회인에 관한 조선시대 자료를 복사한 것이었습니다. 저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복사할 마음은 내지 않았습니다만, 그 얘기를 듣고 저는 뒤통수를 쇠몽둥이로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통증은 정말 오래도록 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지금껏 남아있습니다.

사실 회인에 관한 것은 조선시대 여러 자료에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도 정부 자료나 이런 것을 살펴보면 회인의 현황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학자가 회인을 연구하기 위해서 1년간 회인 현지에 와서 하숙을 하고 갔다니! 이게 놀랍지 않은 분이라면 이 글을 읽을 자격도 없고 한국인일 자격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을 때는 무기 들고 와서 협박한 단순사실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이미 대한제국 때 해양측량이며 토지조사까지 마쳤고, 그를 바탕으로 한국인들 스스로 나라를 팔아먹도록 친일파를 양성하였고, 그 결과 털도 안 뜯고 한 입에 삼켜버린 것이 을사늑약이고 한일강제합병입니다. 일본의 이 같은 치밀한 작전을 저는 회인의 그 할아버지 말에서 느꼈고, 그 일본인이 살다간 1년 동안 회인은 우리 곁을 떠나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마찬가지 감정입니다.(온깍지학회 카페)

그 일본인 학자의 이름을 제가 그 어르신에게 굳이 물어서 기억합니다. 앞으로 외교부 직원들이 이 이름을 끄집어낼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오카다 마사오.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한테 말로만 들은 이름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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