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라면 한 그릇
[기고]라면 한 그릇
  • 충청매일
  • 승인 2019.03.1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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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자
수필가

[충청매일] 퇴직 후 밭으로 출근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인생의 2막을 여는구나!’ 생각했지, 마음잡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남편은 오전에 밭으로 갔다가 오후엔 목욕탕에 가고 쉬는 시간 없이 일을 찾았다. 병이 날까 걱정되어 쉬라고 해도 괜찮다고 했다.

남편은 고구마, 참깨, 배추, 무를 열심히 가꾸고 거둬들였다. 한 번은 고구마 줄기 1만 포기를 심어 가뭄에 반은 죽고 5천 포기는 살아남아 고구마 400박스를 캤다. 택배비, 상자 구매비 등, 고구마를 지인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옛말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뙤놈이 챙긴다고 하더니 남편이 농사지은 농작물을 땀도 보태지 않고 나눠주기 바빴다. 밭에 가서 남편이 하는 일을 보고서야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의 얼굴에 마부리같이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힘들게 농사지은 것을 판매는 하지 않고 지인들에게 나눠주느라 바빴으니 내가 철이 한 참 없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은 어깨가 아프다는 말을 했다. 병원에 다녀오라고 해도 가지 않았다. 목욕탕을 마감하고 집에 온 남편이 어깨통증을 호소해 함께 병원에 갔다.의사는 어깨 횡격막 끈이 끊어져 유착되었다고 했다. 남편은 전신마취 후 3시간에 걸쳐 시술했다. 3시간 동안 모든 장기의 활동을 멈추게 하였으니 몸이 회복되기까지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남편은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어했다. 아파도 참아야 한다고 장기가 깨어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당신이 의사냐고 하면서 화를 냈다.

남편은 일주일을 입원하고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집에 온 날 남편이 수고했다며 라면을 끓여주겠다고 했다. 나는 달갑지 않았다. 밀가루 음식은 건설업을 할 때 신물 나도록 먹었기 때문이다.

가족들 아침 준비와 남편 출근 준비를 해 두고는 아침밥도 거른 채 현장으로 나갔다. 현장 점검을 하다가 새참 시간에 닿는 현장이 있으면 국수 한 그릇으로 한 끼를 때웠다. 오전과 오후 새참으로 현장에서 국수를 먹던 시절이었으니 매일 두 끼는 국수가 하루를 살게 해 주는 에너지원이었다. 10년 세월 밥 한 끼 먹지 않고 국수를 먹으니 위가 골을 부렸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만 먹으면 탈이 나기 시작했다. 위경련 때문에 병원도 수없이 들랑거렸다.

아이들이 크고 시간이 여유로워지면서 새참 국수를 끊고 밥을 먹으며 위를 다스려놓았다. 남편은 마누라 위가 밀가루 음식을 거부하는 것도 잊었나 잠시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하긴, 아픈 어깨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으랴. 라면을 끓여준다는 남편 마음을 받아 기쁜척했다. ‘어깨가 아픈데 어떻게 하려고.’ 했더니 나한테 조수를 하란다. 냄비에 물을 담아 달라고 한다. 남편은 끓는 물에 라면을 넣으며 파와 호박도 썰어달라고 하더니 한 손으로 집어 냄비에 넣는다. 3분이 지나 다 됐다며 식탁으로 옮긴다. 병원에서 자기 보호자로 있어 줘서 고마워 대접하는 거란다.

아픈 남편이 끓여준 라면 한 그릇을 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위가 약해 밀가루 음식은 안 먹지만, 오늘 라면은 남편의 사랑과 정성이 담겨있어 맛있게 먹었다. 보글보글 어우러져 끓는 라면처럼 남은 시간도 서로 보듬으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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