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숙 수필가

“아버님이 의식이 없으시대요. 의사가 오늘을 넘기기 어렵다고 하네요. 그래서 지금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당신도 빨리 서둘러 오세요.”

오후 지하철 안이었다. 다급하고 큰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 여인을 향했다. 객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위독한 시아버지의 상태를 손전화로 알리고 있었다. 4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코가 오뚝하고 목소리만큼이나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인형의 얼굴이었다.

아! 그런데 당연히 울상일 것으로 생각한 그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밝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달리는 객차 안을 좌왕우왕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흡사 무슨 기쁜 일에 들뜬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를 주시하는 많은 시선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미안한 지경이었다. 하지만 혹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의 눈을 떼지 못했다.

슬퍼하는 모습이 역으로 저렇게 표현되기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늘 웃는 상이라 그것이 굳어진 것일까? 의아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노환으로 누우신 후 오랜 병간호 끝에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떠올랐다. 혼수상태로 계셨던 3일간은 온 집안이 눈물바다였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식사를 거부하는 시어머님과 시누이들을 달래야 했다. 나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두 다리 뻗고 앉아 큰소리로 실컷 울고 왔으면 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평소처럼 ‘아부지’하고 부르면 두 눈을 번쩍 뜨실 것만 같았다. 그때 아버님의 얼굴과 손, 발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드리며 “아버님 아무 걱정 마시고 편하게 눈 감으셔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하며 흘렸던 눈물의 시간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기만 하다. 지금 그녀는 당연히 눈물지을 때가 아닐까? 세상의 급변화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세태도 달라진 것을 내 미처 몰랐단 말인가.

그녀는 왜 웃었을까?

어쩌면 그녀는 많은 유산을 물려받게 되어 기대에 부풀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뿌듯하고 든든한 맘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백수(白壽)에 가까운 연세였다면 그분의 편안한 영면을 기원하며 절로 마음이 가벼워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죄송하지만, 그녀의 시부는 오랜 식물인간 상태였을까 상상도 해보았다. 그렇다면 논란이 됐던 안락사의 소용돌이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쌓였던 병원비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했을 것이다. 그 긴 병간호에서 놓여난다는 해방감이 밀려올 수도 있었겠다. 사실 얼마나 웃고 싶었겠는가? 마음속 무의식이 자신도 모르게 뛰어 올라왔으리라. 오히려 너무나 인간적이지 않은가 하고 그녀를 변호해 본다.

하긴 그 고충은 겪어보지 않았으면 모르는 일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가족들 간에 불화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정부에선 장기요양보험을 비롯해 노인복지정책들을 속속 등장시키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누군가의 봉사와 희생 없이 노인을 돌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옛 유교 사상과 현재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사회현상의 틈바구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며느리가 몇이나 될까? 예쁜 그녀도 그 혼돈의 시간 속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장례식장의 분위기만 떠올려도 그녀의 웃음을 탓할 수만은 없다. 수명이 길어지다 보니 호상(好喪)인 상가(喪家)가 많아진 작금이다. 어떤 상가는 잔치집을 방불케 하기도 한다. 웃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이들 노래자랑까지 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상주들이 버젓이 화장하고 귀금속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기도 한다. 아무리 호상이라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노인이 전체 인구의 11%에 달한다는 우리의 현주소는 고령화 사회로 자리매김 중이다. 호상의 주인공만큼 늙은 자식들이 상가를 지키고 있다. 그곳에서 울고불고하면 흉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그 상주들은 웃고 있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웃는 자식들이 늘어날 것 같은 상상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아닐 것이다. 부모 잃은 설움이 어디 가겠는가. 당장 웃어버린 그녀 또한 두고두고 눈물을 흘리며 고인을 추모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는 왜 하필 지금 웃고 있느냐 말이다. 대나무 숲도, 하다못해 화장실도 아닌 달리는 지하철 객차 안이라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말이다. 손전화의 특성상 아무도 듣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지켜보던 승객들은 고사하고라도 그 동안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 자신에게조차 미안한 일일 것이다.

시간은 지하철처럼 앞으로만 달려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죽음 앞에서 잠시라도 숙연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게 다가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함부로 웃지 말자. 미소조차도 감춰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동시대에 부모님께 정성을 쏟고 있을 우리네 며느리들의 자존심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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