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철 행복나눔협동조합 대표이사

나는 TV를 잘 보는 편은 아니다. 혹 본다면 아침저녁으로 뉴스정도다. 언젠가 뉴스를 보려고 채널을 돌리다 재미있는 광경이 있어 한참 동안 본적이 있다. 아마 대담프로였던 것 같다.

사회자가 한 할아버지께 “다음에 태어나셔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겠습니까?”하고 질문하자 할아버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럼요. 또 함께 살아야죠”하며 옆에 앉은 할머니를 힐끗 본다.

그러자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아이고 그런 말은 하지도 말아요. 지금까지 살았으면 됐지 또 살아요? 난 싫어요”하며 손사래를 치신다. 그 모습에 머쓱해진 할아버지는 “어허허”하며 너털웃음만 짓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잠시 생각해 본다. 나라면 어떤 대답을 할까? 할아버지처럼 당연히 또 살고 싶다고 할까? 아니면 대답 대신 빙그레 웃을까? 반대로 아내의 답변은 어떨까? 그 할머니처럼 손사래를 치며 거절할까? 나의 입장을 생각해서 마지못해 조그마한 소리로 “그럼요”라고 할까?

불교에서는 ‘부부의 인연이 되려면 칠천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 칠천겁의 시간은 백년에 한번 내려오는 선녀가 그 치맛자락으로 스쳐서 커다란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라고 하니,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긴 시간이다. 그러나 그런 그리움으로 만난 부부지만 늘 그립고 따사로운 관계만은 아니니 그 또한 이율배반적이다.

글을 쓰다보면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의 이야기가 가끔 등장하게 된다. 소소한 가정적인 일이 대부분이라 나름대로 담담하게 쓰는 편인데 독자들의 반응은 영 다르다. 특히 친구들은 바로 항의 전화가 온다. “류 박사, 당신 그런 글을 쓰면 어떻게 해. 누구 부부싸움 조장하는 거야 뭐야. 당신만 애처가인 것 같잖아.”

아이들이 장성해 결혼할 나이가 되니 은근히 걱정스러운 일이 있다. 지금까지 자기들 앞가림은 스스로 잘 알아서 해 왔기에 큰 걱정은 안하지만 그래도 배우자만큼은 신중을 기해서 선택했으면 한다. 너무 겉모양이나 직업에 이끌리지 말고 인성과 지성을 겸비한 배우자를 만났으면 한다. 바쁜 일상 중에도 시간을 내어 연극을 보러가고, 문학을 말할 수 있는 친구로서의 배우자, 세상사로 몸과 마음이 지치고 아플 때 위로해 주고 격려해 줄 수 있는 부모 같은 배우자. 모두들 욕하고 흉볼 때 그 사람만은 나를 믿어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동지로서의 배우자를 만났으면 좋겠다.

아내가 이 글을 보게 되면 분명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여보, 당신도 다음에 태어나면 나와 또 결혼할 거예요? 그 때 난 무슨 답변을 할까? 아마 “글쎄요”라는 애매한 답변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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