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극락보전으로 향하는 길에는 백제의자대왕위혼비가 서있고 제단까지 마련돼 있다. 제단의 양옆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지키고 있다. 비문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리던 의자왕이 당에 끌려가 대륙백제의 웅지를 낙양 북망에 묻어버리고 유해조차 돌아오지 못한 한을 적었다.

얼마나 절절히 썼는지 구절마다 피눈물이 배어날 지경이다. 합장하고 삼배를 올렸다. 그가 영웅이었든 아니었든 나도 그에게 사랑받은 백제인의 후예라도 된 듯 가슴 아팠다.

웅장한 계단을 오르니 단청도 없는 현판이 백제극락보전이다. 법당에서는 염불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 촛불조차 꺼졌다. 그러나 남향으로 볕이 들어 따뜻하다.

영가전에는 백제국의자대왕, 백제국부흥대군, 백제국달솔여자진장군, 백제 부흥을 지원했던 왜국의 장군 삼인의 영가를 모셨다. 달솔여자진장군은 도침대사라는 것을 후에 스님에게 들어 알았다. 백제 부흥을 위해 3년간이나 항전하다 삼천굴에서 열망을 불사르고 산화한 한스런 영령들을 모신 것이다.

의자왕은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었기에 태자 때부터 해동증자라 불렸다. 왕위에 오른 처음에는 국정을 개혁하고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해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말년에는 신라 김춘추의 적극적인 친당정책에 밀려 당이 친신라로 기울어 외교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해 비운의 마지막 왕이 됐다.

서기 660년 8월 2일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태자, 왕자, 대신, 백성 1만2천여 명과 함께 당의 낙양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바로 얼마 후에 병사했다. 60대 중반의 노년이었다지만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왕의 심경을 짐작할 만하다. 그의 시신마저 사랑했던 백제로 돌아오지 못하고 낙양 땅 어느 곳에 묻혔는지 알 수도 없다. 딱한 후손들이 중국에서 백제 유민의 안타까운 명맥을 이어갔을 것이다. 아마도의 자왕의 한스런 영혼만은 수없이 백제의 하늘을 떠돌았을지 모를 일이다.

이제 백제 부흥의 마지막 근거지인 운주산성 기슭의 고산사에 위혼비를 세우고 극락보전에 영가를 모셨으니 아마도 편안하게 좌정했을 것이다. 고산사에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음력 9월 8일이 낀 토요일에 22년째 영혼을 위로하는 백제고산고산대제를 지낸다. 이뿐 아니라 옥천 구진벼루에서 신라 김무력 장군의 매복군에게 죽음을 당한 26대 성왕의 재는 음력 7월 20일,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음을 당한 개로왕의 재는 음력 9월 25일에 지낸다. 이제 고산사는 백제의 한스런 왕들의 영혼이 편히 잠드는 지상의 안양이 된 셈이다.

우리는 왜 패자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묻어버리는지 답답한 일이라는 스님의 말씀에 나도 공감했다. 백제의 역사도 그렇고 고구려의 역사도 그렇다. 조선의 역사는 또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얼마나 왜곡됐는가? 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평가도 정치적 승자에 의해 오락가락한다. 차는 주인의 안타까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포장도로를 울렁거리며 내려와 고려산성을 찾아 1번 국도를 북으로 달린다. 핸들을 잡은 느림보의 마음은 더 심란하고, 방송에서는 갈라섬과 만남으로 혼탁한 속셈정치 뉴스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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