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충북예술고 교사

노자는 참 많은 판본이 있는 책입니다. 그 중에서 하상공 본과 왕필 본이 가장 유명합니다. 저는 왕필 본을 영인본으로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한문에 짧고 머리도 나쁘다 보니 뭔 소린지를 알 수 없는 문장이 많았습니다.

원래 깨달음에 이른 현자들의 말은 우리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본 세계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본 세계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향해 나가다 보면 우리의 일상 경험과 다른 부분도 있고, 신비 체험도 있으며, 우리의 삶을 지금과 똑같이 보여주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다양한 모습들을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면 속이 시원하겠지요. 그렇지만 옛날의 경전들을 읽다 보면 그것을 읽는 사람의 수준이 천차만별이어서 똑같은 글에서 읽어내는 내용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이런 까닭에 저도 노자에 관한 번역서는 10권도 더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도가 지나서야 뒤늦게 박영호의 책을 만났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것은 번역한 사람의 수준이 그 책의 심오한 부분을 읽어내는데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노자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먼저 정하지 않으면 노자가 보여주는 의미는 다양한데, 그 다양성을 넘어서 동서양을 회통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통해서 노자가 조명된다면 그것은 거의 확실한 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거의 정답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숱하게 노자 번역본을 넘나들다가 이제는 이 책 한 권이면 되겠구나 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른 번역자들이 갈팡질팡 한 곳에서 박영호는 조금도 서슴지 않고 자신에 찬 해설을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번역자들이 노자를 볼 만한 정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역설로 증명하는 일입니다.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했지만, 인식과 깨달음의 한계가 있으면 그 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나라의 노자 해설서도 궁금해지는데, 다른 나라라고 해서 상황이 다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좋은 해석본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축복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축복이란 말을 제가 많이 쓰는 듯합니다. 우리나라는 덩치로 보면 작은 나라지만, 그 정신으로 보면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듭니다. 이런 생각은 좋은 책을 만나면서 드는 것이니, 이 또한 책이 주는 축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깨달음에 이른 사람의 비율은 1억분의 1 확률이라고 하더군요. 하하하. 그렇다면 오늘날 지구에 사는 인구가 60억이니, 아마도 전세계에 60명 정도 깨달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 단순논리라면 1억명이 채 안 되는 우리나라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없다고 봐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 이 분은 정말 깨달은 분이구나!’하는 느낌이 팍 오는 사람이 꽤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1억분의 1 확률보다 더 낮은 비율을 지닌다는 얘긴데, 뒤집어 말하면 그것은 그만큼 죽음과 삶을 고민한 사람이 많다는 얘기고, 그것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가 그만큼 고통스러웠다는 얘기도 됩니다. 실제로 우리 겨레의 수난사는 다른 나라와 견줄 수 없을 만큼 힘겨웠음을 국사시간에 많이 배웁니다. 고난은 성자를 낳는 밭이기도 합니다. 과연 이것이 행일까요 불행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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