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올해 겨울은 시작하면서부터 눈 풍년이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눈은 영하의 날씨와 합세해 도시를 빙판으로 만들었다. 흰 눈이 품은 동심을 잊은 지는 오래다. 눈 예보만 나와도 덜컥 겁부터 난다.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를 운전하면서부터 생긴 버릇이다.

집을 나서 눈길을 걷는 날엔 조신한 새색시마냥 종종걸음으로 한시도 긴장을 놓지 못하고 발밑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올 12월의 눈은 사납고 고약하다.

집근처 ‘풍년골 공원’엔 아침 일찍부터 관리하는 노인이 눈을 쓸다가 내가 인사를 나누니, 미끄러운 길 조심하라고 새삼 당부다.

흰 눈이 그대로 쌓인 공원 숲속으로 부지런한 새벽손님 흔적도 보인다. 솔잎모양 멧비둘기 발자국도, 공원의 터줏대감 얼룩무늬 고양이의 꽃잎모양 발자국도 점점이 찍힌 채 대숲으로 이어져 있다.

한차례 불어 온 바람에 솔가지 위 쌓인 눈이 햇살 속으로 은빛가루를 흩날린다.

아침 속 작은 눈의 나라이다.

그 순간 희미한 머릿속 기억의 저편에서 영상 하나가 선연하게 튀어 나온다.

눈 내리는 저녁이었다.

산사로 오르는 길은 사람의 발자국을 찾을 수 없는 흰 백지장이었다. 산짐승들만이 간간이 지나간 흔적이 보일뿐이다. 단지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겠다고 치기어린 스무 해의 나는 산사로 가는 눈길을 헤치며 그 저녁에 오르고 있었다.

나는 실의의 청춘이었고 무엇인지 모르지만 실체 모호한 것들을 찾아 삶의 방향과 좌표를 얻으려 무던 애를 썼었다.

골짜기의 바람이 눈발을 이끌고 사정없이 사하촌 쪽으로 맹렬한 기세로 달려 내려왔다.

저녁을 짓는 공양 간엔 종교 수련회를 온 대학생들로 분주했다. 머리와 어깨에 눈을 잔뜩 이고 물끄러미 어두운 절 마당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내게 그중 한 여학생이 말을 걸었다. 그리곤 지금은 바쁘니 다음날 자기를 찾아 방문해 달라고 긴히 당부를 했다. 그녀는 자신을 회장이라고 소개했다.

사나운 눈보라 속 눈길을 뚫고 온 내게 묻어 있던 청춘의 짙은 그늘이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일까! 아님 위태로워 보이는 청춘에게 일말의 연민으로 위로의 대상이 되고 싶었던 걸까! 그때나 지금이나 진의는 알 수 없다.

그녀의 일방적인 약조와 내 게으름으로 다음날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은 일정에 따라 오전에 새때처럼 떠났다. 그렇게 그 기억도 내 생의 세월 속 유속에 파묻혔다.

서산대사는 말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 함부로 걷지 말라고, 내가 남긴 발자국이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 시절 눈길 속 내 발자국이 내 생의 어딘가에 늘 자리하고 있으며 지금 여기까지 살아오는데 바른 좌표로 인도 하였는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곡절 많은 생의 구비마다 쓰러지던 마음을 곧추 세우는 이정표로 때때로 작용했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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