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의 새 지평 열다
동양화의 새 지평 열다
  • 충청매일
  • 승인 2013.03.1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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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유산시리즈 탄생
청록산수 공식 선보여
농아인 권익·지원위해
한국농아복지회 창립
6년걸쳐 복합문화공간
청주 ‘운보의 집’ 완공

추상작품과 변화

▶중년기 [51~62세]

운보는 53세가 돼 본격 추상계열로 들어가며 태고의 이미지, 청자의 이미지, 유산의 이미지 등을 연작으로 발표했다.

운보는 앞서 45세에 ‘화실만필’이라는 글에서 “동굴벽화나 아프리카 미개인들의 조각, 이집트 벽화 등을 보면 이상할 정도로 광적으로 변해버린다”며 “복잡하고 숨 막히는 현실보다 바보에 가까운 원시시대의 소박, 단순한 삶의 미술을 개척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생각들은 태고, 유산 시리즈를 탄생시키며 동양화의 새 지평을 열기 시작했고, 이후 민화 시리즈와 노년의 바보산수, 점, 선 시리즈로 연결 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우리가 운보의 대표작으로 꼽는 ‘태양을 먹은 새’도 그 내면의 세계를 잘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운보가 “나의 분신과 같으며, 우주로 비상해 우주자체를 집어삼키고 싶은 내 심정의 표현이기도 하다”고 할 정도로 애착을 갖던 작품으로 사석에서 필자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그 때 뉴욕에서 우향이 미술공부를 하러 나가면 선생님은 집에 혼자 남았다고 했는데 이국에서 이웃과 말도 통하지 않았고 자신의 처지가 답답해 너무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무언지 모를 분노와 울분, 신세 한탄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이를 표현 한 것이 ‘태양을 먹은 새’라고 했다. 이때 제작된 ‘나비의 꿈’, ‘석양의 군마도’, ‘준동(蠢動)’, ‘불사조’ 등도 현대적인 작품으로 주목을 끌었으나 ‘태양을 먹은 새’는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는 걸작이다.

1970년 운보는 그동안 시도했던 청록산수를 현대화랑에서 공식적으로 선보였다.

운보를 말할때 보통은 청록산수와 바보산수를 거론하는데 청록산수는 농촌과 산수를 소재로 해 편안하면서도 한가로운 전원마을의 정경을 그린 것으로 현실의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 유유자적한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갖기에 충분했으며 이후 청록산수는 운보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됐다.

운보는 현대화랑의 박명자 대표가 어린 시절 인사동 화랑의 사환으로 있을 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자신이 화상이 되기를 권했다면서 대단한 아가씨라는 칭찬을 자주 했다.

이날 개막식에는 운보의 스승 이당 김은호도 참석해 축하 해 줬는데 이당은 순종황제의 초상화를 제작한 어진화가로 이당의 마지막 제자인 김성태는 청원군의 손병희 영정을 제작 했으며 이당의 제자들은 모두 인물화에 뛰어 났다.

그 중에서도 운보는 수많은 영정을 제작했는데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와 조헌을 비롯해 1973년에는 세종대왕의 영정을 제작하기도 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만원권 지폐속의 세종대왕을 영정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이것은 만원권을 만들기 위해 1975년에 별도로 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한국은행이 소장하고 있으며 세종대왕의 영정은 세종전에 봉안되어 있다.

 

▶노년기 [62세~]

우향은 1975년 9월 미국에 갔다가 쓰러져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11월 귀국해 백병원에 입원 하고 있던 중 1976년 1월 운보와 가족을 남겨 두고 56세 나이로 타계했다.

하늘도 운보의 막막한 심정을 알아 준 걸까. 우향이 타계한 1월 2일은 온 천지가 안개로 뒤덮였었다고 한다.

올 3월 청주방송에서 제작한 운보 탄생 100주년 특집 ‘바벨의 후예’ 인터뷰에서 운보의 애제자인 심경자씨는 “사모님 돌아가신 날 제가 평생에 한국에서 그렇게 안개가 낀 건 처음 봤어요. 운보 선생님 댁이 안개에 쌓여가지고 둥둥 떠올라 가는 것 같았어요.”라고 말했고, 운보도 “성북동 집에서 23년을 살아봤어도 안개가 방으로까지 스며들기는 그날이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상상 못했던 우향의 죽음에 운보는 너무 큰 충격과 허탈감을 느꼈다.

“혼자 남은 내가 이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49일 동안 꼼짝도 않고 우향의 사진만 쳐다보며 하루를 보내던 운보는, 오랫동안 머릿속에 엉켜 있던 민화에 대한 생각들이 갑자기 실타래처럼 풀리게 됐고, 민화에 바탕을 둔 다작의 바보산수를 일사천리로 제작해 전시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우향의 죽음은 운보에게 너무나 큰 영향과 변화를 주었다.

1년 후인 1977년에는 우향 1주기를 맞아 수필집 ‘침묵의 세계에서’와 산문집 ‘나의 사랑과 예술’을 출간했고, 이미 타계한 우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북동 자택을 헐고 사설미술관인 운향미술관을 지어 개관했으며, 1978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우향 유작전’을 개최하면서 대형화집인 ‘우향 박래현’과 우향의 ‘화문집’을, 운보 자신의 산문집 ‘침묵과 함께 예술과 함께’(경미간행)를 출간했다.

같은 해에 여러 의미로 복합 문화 공간을 갖추고자 결심한 운보는 어머니의 고향 청주 근교에 땅을 매입했다.

또 할머니, 어머니, 우향에게 받은 사랑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것을 실천하고자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에 취임했다.

사회정책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알고 청각장애 선배로서 운보가 “난청의 비애를 후배에게 물려주지 말자, 사회의 벽을 넘도록 도와주자”는 생각에서 청각장애인들이 직업을 갖도록 직접 기술을 배워 주는 일을 추진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것들은 우향의 고마움에 보답할 기회를 놓친 운보가 통곡하는 마음으로 그 동안 마음속에 갖고 있던 일들을 하나 하나 실천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운보는 청음회관, 한국농아복지회, 운보원 등을 설립하며 기술 지도에 힘쓰는 한편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국에 있는 농아들의 권익과 지원을 위해 지부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농아복지회를 개척하면서 많은 돈이 필요했으므로 청주의 일은 서두르지 않고 6년에 걸쳐서 조금씩 공사를 했고 1984년 ‘운보의 집’을 완공했다.

청주에 살던 외사촌 동생 한동길씨(나이 차이가 많아 남들은 조카로 불렀다)가 땅을 관리하고 공사를 도왔으며 완공 이후엔 온 가족이 운보의 집에 기거하며 함께 살았다.

실질적으로 운보의 집 집사 역할을 했던 한동길씨가 불운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처와 1남 5녀의 유족들은 친지들이 모여 있는 청주로 나왔고 그의 자녀들은 극진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모시며 현재 훌륭한 성인들로 성장했다. 

1988년 운보는 예술원 정회원으로 위촉 되었고, 점과 선을 주제로 한 심상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시 MBC에서 동·서양화, 조각 등 생존 작가 중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운보 김기창’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음과 동시에 그의 우직하고 열정 있는 삶의 모습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형태 국제장애인문화교류 충북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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