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폭설이 내리 퍼붓던 날, 도심은 속수무책 재앙으로 되어 버린 눈 속에서 마비가 되었다.

그 눈 속을 뚫고 이십대의 생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 청바지아가씨가 부동산 중개업소의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초라한 옷차림새에 비해 입가엔 웃음과 맑은 눈빛을 가졌지만, 어딘지 전체적으로는 발달이 덜된 어린 여중생 같아 보였다.

그녀가 방을 구하는 것은 단 하나의 조건이었다. 월세가 이십만원 이하인 방을 구하는 것이었다.

지하방이라도 좋으니 싼 방을 구해 달라고 했다. 또래 자식을 키우는 중개사 지인은 갑자기 마음이 짠해져서 청바지아가씨에게 이것 저것을 물어 보았단다.

그녀는 C대학교 의대생이었다. 집은 서울인데 소위 SKY대 갈 실력이었지만, 지방인 청주로 내려 온 것은 C대에서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기에 내려 왔단다. 부모님은 막노동을 하며 살기에 집에 손을 벌릴 형편도 아니란다.

당장 학비는 면했다 해도 먹고 자는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니 학교 공부와 병행하며 학생들 과외를 해서 충당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엄동설한에 그녀가 원하는 조건의 월세 방들이 있을 리 만무인데, 주인집에선 살고 있는 월세방을 다시 수리해서 세를 올린다 하니 그녀는 그 몇 만원도 아껴야 하는 판국이라, 부득이 집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전 내 이십대의 어느 겨울날 한 시절이 기억의 먼지를 일으키며 수면위로 떠올랐다.

오랜 병고 속에 계셨던 아버지는 일찌감치 가족을 위한 밥벌이에서 물러나셨기에 어머니가 우리집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어린 두 동생들이 내 밑으로 더 있었기에, 집에 손 벌릴 처지도 아니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나는 대학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해결하며 학업을 이어가야 했다. 

아르바이트로 인해 밤늦도록  도서관에 있어 보지도 못했고, 그 흔한 대학의 M.T 또한 제대로 가본적 없이 대학 1년을 숨 가쁘게 보내고 났더니, 심신이 극도의 피로감에 시달려 조울증 비슷한 상태까지 왔다.

새해 벽두였다. 옷가지 몇 개를 가방에 넣고 쫓기듯 나는 속리산자락 사하촌으로 숨어들었다. 여관주인 여자는 어린 여학생이 어딘지 미덥지 않은지 수시로 방문을 두드려 아침 저녁을 챙겨 먹였다.

눈 내리는 저녁이었다. 저녁 예불 종소리를 듣기 위해 맹렬한 눈 속을 사투하듯 걸으며 법주사 경내에 들어섰을 때엔 이미 공양 간에선 저녁밥을 짓느라 분주했다.

어두워지는 경내에서 눈을 맞으며 공양간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대학 동아리에서 산사 체험을 왔다는 내 또래 여학생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내게 다음날 오전에 꼭 절에 들려 달라고 했다. 오후에는 자신들도 그곳을 떠난다고 했다.

나 또한 그 시절 간절하게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밤을 하얗게 새우고 내린 결론은 이야기를 나눈다고 무슨 소용일까에 휘둘려 그녀를 찾지 않았고, 그 겨울날은 그렇게 세월에 묻혀 버렸다.

나는 그때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나의 강력한 어떤 멘토가 방향성 없던 청춘에게 따뜻한 응원을 해주기 바랬는가! 아마도 둘 다 이었는지 모른다.

예전보다 더 일찍 찾아온 올해의 추위는 매서운 칼바람이다.

그러나 가난에 내 몰린 청춘들은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치는 아르바이트에 몸들이 고달프다.

방학동안 전공 공부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한 푼이라도 벌어 다음 학기 등록금을 충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권 주자들은 반값 등록금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막바지 유세에 혈안이다.

다행히 그 의대생은 주인집이 수리를 보류하는 바람에 이 겨울은 살던 방에서 지내게 됐단다.

부디 그녀가 가난에 쓰러지지 않고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에 입각한 밝은 미래의 의사 선생님으로 꿋꿋하게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겨울은 누구나 춥다.

하지만 가난이 더욱 매서운 추위를 몰고 와서는 안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