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엔 지난 가을에 무성했던 물 억새들이 햇빛 속에서 한껏 고혹하더니 이제는 그 빛도 다 잃은 채 찬 바람 속에서 이리저리 서로의 몸들을 부딪치며 서걱 거린다.

유년시절 가을걷이가 다 끝나가고 바쁜 일도 한시름 덜어지면 그때부터 다시 시골의 생활은 다른 일들로 분주해졌다.

사랑 마당에 산처럼 쌓아 놓은 볏단이 긴 겨울을 나는 아버지의 소일거리였다. 사랑마루에 간추려 놓은 볏짚이 수북한 날에는 아버지의 사랑방도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아버지는 그 볏짚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드셨다. 사랑방에는 늘 마실 꾼들로 시끌벅적했다.

그 마실 꾼들이 풀어 놓는 이야기들은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이 많았다. 특히 도회지에 나갔다 돈을 벌어서 시골로 들어온 친척 아재의 이야기는 어린 내가 들어도 무척 흥미로워 과연 도시가 그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부터 내게 도시는 신기루 같은 곳이 돼 버렸다.

서울로 돈 벌러 갔던 동네 처녀들은 시골집에 내려 올 때 마다 집안의 살림살이들을 장만해주거나 통 크게는 외양간 송아지를 사주고 가기도 했다.

그녀들의 얼굴과 피부는 한 결 같이 희고 윤기가 났고 말소리들 조차도 사투리가 없는 세련된 서울 말씨들로 변해 가고 있었다.

작은 언니는 언제나 그녀들이 내려 왔다가 일제히 다시 상경들을 하면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집안 살림을 하던 것도 다 팽개치고 며칠을 밥도 안 먹으며 우울하게 방안에 누워만 있었다. 그런 언니가 나는 안타까워서 차라리 서울서 내려 왔다 몰려 올라간 언니들이 부모님들의 눈을 피해 내 언니를 몰래 데리고 가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 밑에서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완고함에 가출을 감행 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그렇게 한차례 홍역이 지나가면 다시 언니는 김광한의 저녁FM에 사연도 보내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팝송도 흥얼거리며 부엌에서 밥을 짓고 냇가에서 빨래를 해 오기도 하며 한동안 조용히 세월을 보냈다.

겨울나기를 위한 김장을 하는 날들은 무서리가 하얗게 내려 우물가에서 배추를 씻는 어머니의 두 손이 빨갛게 부어오르기가 일쑤였다.

뒤 곁 김장 광을 다시 손을 보고 지붕을 볏짚으로 아버지가 새 이엉을 해서 올리고 나면, 독 안으로 김치들이 종류별로 수백포기가 들어 앉아 긴긴 겨울동안 숙성의 시간에 들어갔다.

저녁에는 종일 밖에서 김장을 버무리며 언 손을 호호 불며 화롯가에서 녹이는 어머니를 위해 내가 어서 커서 돈을 많이 벌어 일하는 사람도 구해줘야겠다고 단단히 벼르기도 했다.

어린것이 당차게도 자본주의 논리를 일찍부터 깨달은 것이 어찌 보면 영악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린 염원은 그 어머니가 해마다 겨울이 오기 전 손수 김장을 담그고 병환으로 자리에 누울 때 까지 지켜지지 못했으니 나의 공약은 망명 정부의 지폐였다.

낙엽 흩날리던 계절을 뒤로 하고 다시 겨울이 찾아 왔다.

멀리 아랫녘 친구에게서는 그 지역 특산품이 어김없이 택배로 오고 가전제품이 발달해 사시사철 김장독을 대신하는 김치 냉장고에는 1년내내 먹을 김치들로 가득찼다.

올해도 혹독한 추위가 온다고 한다. 그 추위 속에서도 소외된 이웃들을 자주 돌아보고 서로 감싸 안고 인정을 펼치는 사회를 꿈꿔 본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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