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가정은 하숙집이요, 잠시 머물다 에너지를 충전하는 정류장이라는 말이 맞는가 보다. 왜냐하면 몇 명 안 되는 가족 구성원이 낮에는 서로 정신없이 뛰어 다니다 밤늦게야 집에 들어와 잠시 얼굴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단란한 우리 가족을 해체시킨 주범은 바로 고등학교였다. 아이들이 우리 부부와 대화를 서서히 줄인 때도, 또 늘 피곤한 모습으로 초조해 하던 때도 바로 아이들이 고등학교 다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이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사회통념에 따라 아이들과 우리 부부는 3년 동안 열심히 수행(?)했다. “그래 까짓 3년 기다리지 뭐”하며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딸은 3년이 지나자 자기가 원하는 대학을 찾아 ‘훌쩍’ 떠나버렸다. 그 후부터 사랑스러운 딸과 만나는 것은 몇 달에 한 번, 아니 더 멀리는 방학 때나 명절 때 한 두 번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엄마, 아빠 저 왔어요”하며 밝게 웃던 딸이 이젠 아예 직장을 중국에 뒀으니 헤어짐은 점점 더 길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아들은 집에서 대학을 다니는 효도(?)를 보여줘 아내와 나는 늘 든든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남아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2년 동안 군대에 가있으니 이 역시 이별 아닌 이별이 돼 버렸다. 가족 간의 사랑을 나누고 즐거운 추억을 남기고자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시작한 가족여행도 이와 같은 이유로 벌써 몇 년째 4식구가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

올 여름 동안 나는 논문마무리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또 딸아이도 국제 학술대회 논문발표 때문에 나만큼이나 바쁘게 보낸 것 같다. 다행히 딸아이가 10월초에 휴가를 얻게 돼 우리 3식구는 잠시 휴식을 위해 북해도로 가족여행을 다녀오게 됐다.

“참 보기 좋습니다. 한 가족이시죠?”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한 동안 우리를 보고 있다가 조용히 말을 건네신다.

“예, 맞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친구 분들과 함께 오셨는가 보죠?”

“어릴 적 동네 친구들이요. 칠순 기념으로 부부가 함께 오기는 왔는데, 생각보다 힘이 드는군요”하시며 계속해서 다리를 두드리신다.

“젊은 시절에는 가족 먹여 살리느라 정신없다가, 이젠 여유가 된다고 생각해서 여행을 다니긴 다녀도 몸이 못 따라 주니…. 여행이 아니고 고행이요. 고행”하시며 싱긋 웃으시는 모습에서 삶의 희미한 그림자를 보게 된다.

“젊은 양반! 우리가 70 평생 살아 보니, 인생이라는 것 별 것 아니요. 여기에는 돈 많은 친구도 있고,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는 친구도 있으나 지나고 나니 아무 것도 아닙디다. 우리가 조금 전 식당에서 이구동성으로 말했는데 여기서 가장 부러운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젊은 양반 당신이요. 가족이 건강하고 서로 오순도순 살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하겠소. 부디 오늘과 같은 화목한 가정을 계속 이루셔서 보는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됐으면 좋겠소”하며 내 손을 굳게 잡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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