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근의 펜] 조건만 맞으면 일 년에 두 번도 산다
[오원근의 펜] 조건만 맞으면 일 년에 두 번도 산다
  • 충청매일
  • 승인 2021.10.13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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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자라면서 열등감이 컸다. 아버지의 잦은 주사(酒邪)와 게으름으로 집은 불안하고 가난했다. 어머니는 오일장을 다니며 행상으로 자식들을 키웠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 어머니의 고달픈 삶을 보상해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 이런 것들이 뒤섞여 정서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스스로 많이 억눌렀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정서적 안정을 얻게 된 것은 자연과 함께하면서다. 절에서 사법시험 공부할 때 산과 들을 자주 거닐었다. 호수 건너편 짙푸른 산을 배경으로 백로가 날아가는 모습, 산길에서 꿩이 병아리들과 걸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노라면,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사법시험 2차 준비 마지막 한 달은 서울의 동생 자취방에서 했다. 반지하라, 벽에 곰팡이가 슬고, 밖에 있는 공용화장실을 써야 했다. 어느 날 화장실이 고장 나, 집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영화사나 지하철 화장실로 가야 했다.

시험을 며칠 앞두고 무척 불안했다. 책상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반지하이니, 논 높이랑 바깥 바닥 높이가 비슷했다. 갈라진 콘크리트 바닥 틈 사이로 자란 풀 한 포기가 보였다. 그 풀만 바라보았다. 거기에 기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30분 정도 안에서 올라오는 불안을 그대로 견디며, 오롯이 풀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지고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힘을 다해 사는 그 풀의 강한 생명력이 내게 옮겨 온 때문일 것이다. 그 힘으로 당당하게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겨울에서 봄이 되면서 기온이 올라가고, 반대로 가을에서 겨울이 되면서 기온이 내려간다. 방향은 다르지만, 봄과 가을 온도가 같을 때가 있다. 놀랍게도, 어떤 생명은 이처럼 온도가 같을 때를 틈타 일 년에 두 번 살아난다. 달래와 표고버섯이 그렇고, 우리 마당에 있는 루드베키아와 천수국도 그렇다. 조건만 맞으면, 생명은 언제라도 피어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조건만 맞으면, 일 년에 열 번, 아니 매일같이 새로 태어날 수 있다. 여기서 조건은 일정한 방향과 내용으로 틀 지우는 게 아니라, 생명력을 다하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검사나 변호사 일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틀을 강요하다가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이 범죄행위로 나아가는 것을 자주 보았다.

최근 일이다. 이 아이는 중학교 때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로 정신과 의원 치료를 받으며 약을 먹어왔다. 아이 아버지는 정신과 치료가 기록에 남는 게 부담스러워, 고등학생이 된 후부터는 정신과 상담을 그만두게 하였다. 아이 공부를 위해 친구 만나고 집에 들어오는 시간도 통제하였다. 대학에 들어간 아이는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나름 성실하게 사는 듯 보였지만,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여자 청소년들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아버지는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에게 치료를 그만두고 일방적으로 틀을 강요한 것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생명은 스스로 견디고 느끼며 자라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게 자라난 생명은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쁜 게 없다. 자신의 힘을 다해 자유롭게 자란 것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산과 들에서 제 맘대로 자라는 뭇 생명들을 바라보며 깨닫고 또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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