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정량궁 같은 큰 활을 잴 때 그 세기를 재는 방법을 활터의 구사들한테 들은 적 있습니다. 즉 시위를 장정 둘이 메는 저울에 걸고 줌통에다가 쌀을 1가마 걸어서 들어 올린다는 것입니다. 쌀 한 가마가 매달리면 1석궁, 2가마가 매달리면 2석궁이 되는 것입니다.(‘이야기 활 풍속사’) 그러니까 쌀 1가마가 100근(60kg)이니까, 2석궁이면 200근짜리 활입니다.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책을 보면 황자 궁이니 현자 궁이니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런 활들은 얼마나 센 것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 어유소라는 사람이 100균(鈞)짜리 활을 썼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1균은 3근입니다. 그러니 그는 300근짜리 활을 썼다는 결론입니다. 파운드로는 396입니다.

황자니 현자니 하는 말은 천자문에서 온 말입니다. 천자문이 천지현황으로 시작되는데, 가장 높은 것을 천으로 하고 그 다음을 지(地), 그 다음을 현, 그 다음을 황으로 이름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선시대 최고의 장사가 쓴 활이 300근이라면 이것을 천자 궁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 밑으로 보통 무사가 쓴 활이 100근(132lb) 정도 활이라면 300에서부터 250, 200, 150으로 자연스럽게 등분됩니다. 그러니 천자궁, 지자궁, 현자궁, 황자궁은 300근, 250근, 200근, 150근으로 대조할 수 있습니다. 앞서 본 대로 요즘 한량들이 연습하는 활의 세기가 30~40근 정도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수치는 정말 대단한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6냥이 넘는 화살을 100보나 보내려면 적어도 이 정도 세기는 되는 활들을 써야 했을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김수정 장군의 경우는 육량전의 기록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김수정 장군의 육량전 최고기록은 160보입니다. 최소 8냥이 넘는 작대기 같은 화살이 200미터 가까이 나간 것입니다. 김 장군은 29세(영조 25년, 1749년)에 종2품 자헌대부에 오릅니다. 3년 전에도 똑같은 육량전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그보다 더 2년 전인인 1744년에는 절충장군으로 오릅니다. 이런 식으로 3~4년 간격으로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나중에는 정1품 숭록대부까지 오릅니다. 김수정 장군은 일본 통신사 명단에서 이름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김수정 : 조선 후기의 무관. 1748년 통신사 일행이 도쿠가와 이에시게(德川家重)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정사군관으로서 정사 홍계희를 배행하였다. 사행 당시 관직은 내금위 동지였다. 같은 해 6월 10일 (중략) 에도성에 가서 사예(射藝)에 참여하였다. 김수정은 수일 전에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사후(射帿)와 기추(騎芻) 시험 모두 5발을 맞혔다.(‘조선시대 대일외교사전’)

조선이 활쏘기로 이름난 나라임은 이런 기록에서 입증되는 셈입니다. 승승장구하던 김수정 장군은 나중에 급격히 몰락하는데, 후손 김성인 접장의 말에 의하면 줄을 잘못 서서 그렇다고 합니다.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호위무사였다는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무술을 좋아하여 스스로 수련도 했으니, 이런 인재를 곁에 두었던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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