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출신이 부끄러울 것도 없지만 지나칠 정도로 내세우는 건 낯간지러운 일이다. 과거 군부독재정권이나 권위주의 정권 치하에서 ‘독재타도’와 ‘민주화’를 위해 싸운 전력은 분명 자랑스런 업적이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과거 투쟁경력에 대한 보상을 사사건건, 그리고 공공연히 요구하거나 윽박지르는 행위는 민주화 운동 자체를 모독하는 또 다른 권위주의와 다름 아니다.

운동권 시절 가졌던 민중과 민족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헌신적 열정은 출세나 보상을 기대하는 목적의식 없이 순결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정권의 모진 탄압과 난폭성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투쟁전선을 유지했다. 그 운동권들이 지금 시민사회 각계각층에서 눈부신 활약을 벌이고 있다.

변화의 중심에 선 ‘386’

그 가운데 유신독재 이후 1980년대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정권 시절 대학생 신분으로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부류를 ‘386세대’라고 통칭한다.

386들이 정계, 학계, 언론계, 법조계, 노동계 등에 광범위하게 분포해 ‘일상적 운동’을 계속한다.

정치권에 들어가 합법적 운동을 지속하는 386들은 기성 정치권과 기존 질서에 대한 거침없는 문제제기와 선도적 실천으로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세상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고 과거 운동권의 분석법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사회를 이해한다.

모든 가치관을 정의와 불의라는 이분법의 틀에 맞춰 내가 서있는 곳은 언제나 정의이고, 나와 마주보는 저쪽은 불의라는 투쟁적 시각을 지금껏 고수한다.

나아가 이처럼 지극히 주관적이고도 편협한 분석의 틀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할 것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용감성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선도적 투쟁력이 무분별하게 관성화 되면 그 순간부터 운동권은 변혁 주도 세력이 아니라 사회적 짐이 되는 법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결정적 질병(疾病)의 하나는 변화를 지향하는 세력이 부족한 점도,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보수층의 저항이 강고한 점도 아니고 자칭 변화주도세력과 사이비 운동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놀랍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은, 요란하게 나부대며 목청 높이는 많은 사람들 속에 기회주의자들이 눈뜨고 못 봐 줄 만큼 많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탄압자의 편에 섰거나, 반민중적 정서를 가지고 있던 자들이 세상 좋아지니까 고개 들고 다니며 거꾸로 큰소리치는 농담같은 세상이 돼 버렸다.

운동권 출신이 보상을 챙기려는 심리나 사이비 운동권들이 득세하는 처세는 다같이 건강한 시민사회를 해치는 암적 요인이다.

세상이 어려워질 때 그들이 다시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고 똑같지는 않다.

어느 누구보다 치열하게 운동권으로 살았으면서도 지금까지 일체의 보상을 요구하지도, 알아주기를 원하지도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

택시 운전기사로, 카센터 종업원으로, 외근영업사원으로, 배달원으로, 노동자로, 농군으로 고단한 삶을 이어가지만 민중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함께 나누며 가끔씩 소줏잔을 기울이는 그들을 만나면 나이를 잊고 콧잔등이 시려온다.

사이비·기회주의자는 가라

정치권의 그들처럼 장난칠 재주는 없어도 오로지 순수한 열정으로 아직도 사회변혁을 꿈꾸는 그들이 있는 한 사회적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민중의 삶을 정면에서 대적하지 못하고 애써 외면한 채 변죽이나 울려대는 변질된 386이나 사이비 운동권에게는 더 이상 시민사회 구원의 임무를 부여할 수 없다.

시민사회 성장과 역량강화야말로 관성의 회전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이비 증후군을 치유하는 지름길이다.

시민사회가 변혁세력에게 요구하는 덕목은 ‘일상적 운동’이다. 유난히 낯두꺼운 몇 명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세상은 금세 쓰러진다.

혁명가 그람시(Grmsci)의 ‘소수가 아주 혁명적이고 고상한 생각을 하는 것보다 다수가 약간의 생각을 고치는 것이 훨씬 더 역사적이고 혁명적인 일이다’는 명제는 그래서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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