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4월 5일은 제65회 식목일이다. 식목일은 조선 초기 태조 때부터 음력 3월 10일(양력 4월 5일)에 선농단(先農壇:풍년을 기원하는 제단)에서 적전(籍田: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논밭)을 가꾸던 의식에서 유래됐다.

또한 구한말 순종황제께서도 1910년 4월 5일에 친경(親耕)과 함께 손수 나무를 심은 날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에서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이러한 역사성이 있는 4월 5일을 식목일 공휴일로 제정했다가 지금은 기념일로 바뀌었다.

우리 옛 선조들의 나무심기는 사서나 화첩 등의 기록을 통해 세밀히 알 수 있는데 과학적이며 사람과 함께 자연에 친화했다.

궁궐 주변에는 당시의 사상이었던 풍수지리설에 맞게 조경을 계획했으며 마을에는 각종 재해방지·풍칟종교·생산·경계표기·이정표·휴게소 등 주민의 생활과 밀접하게 적용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의 허결(虛缺:비어 있는 곳)에 나무를 심어 보완해 길복을 가꾸는 것을 비보림(裨補林) 또는 보허림(補虛林)이라 한다.

그리하여 강한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수구막이 숲인 비보림은 인공적으로 조성됐다.

신라시대에는 박혁거세·석탈해·김알지 등 3시조와 관련된 숲을 조성했으며 진성여왕 때도 최치원이 함양에 위천(渭川))이 범람하자 치수를 위해 조림한 상림(上林) 숲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조선 초기 태종 때에는 인왕산·백악·남산·낙산 등 서울의 4대 산에 1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대대적인 치산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시대 식목정책을 가장 잘한 임금은 전문 조경가 못지않은 면목을 지닌 정조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릉원을 수원 화성으로 옮기면서 팔달산 일대에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를, 도로변에는 버드나무를, 북쪽 농경지에는 과일나무와 뽕나무 등을 심었다. 또한 규장각 길 가로수를 소나무로 심었다.

영조 때에는 경남 하동읍 광평리에 광양만 해풍과 섬짐강 모랫바람을 막기 위해 방풍림으로 소나무를 조림했으며 청계천 준설작업 광경을 그린 ‘준첩계첩’에 의하면 청계천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

정약전은 ‘송정사의(松政私議)’에서 당시 산림정책의 폐해(弊害)를 지적하기도 했다. 특히 소나무는 우리 조상들에 앞서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이래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과 고락을 함께한 나무로 척박한 토양에 잘 자라는 특성상 현재도 도시 경관수로 많이 심어지고 있다.

일제 때는 울산 태화강변이 잦은 홍수로 농경지 피해가 심하자 주민들이 8만여평에 달하는 강변에 대나무를 심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은 도로표시와 거리를 나타내는 이정표로 느티나무를 마을 입구에 심어 현재도 시골 마을 어귀에는 이러한 노거수들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앞 원표를 기점으로 후자(흙을 쌓아 올려 이정표로 삼은 것)를 설치했는데 10리마다 소후를, 30리마다 대후를 만들고 후자 주변에는 느릅나무·버드나무·느티나무 등 공공을 위한 녹음식재를 심어 그늘을 드리우게 해 여행자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농업이 기반이었던 옛날에는 농수로에 버드나무와 미루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이는 물의 증발을 막고, 벼꽃이 필 때 바람을 막아내는 지혜를 이용했다.

요즈음 경지정리가 잘된 나무 한 그루 없는 바둑판 같은 평야와는 대조적이다.

각 가정에서는 과일나무를 비롯해 구기자와 같은 약재수 또는 엄나무·음나무·옻나무 등 경제수를 심기도 했다.

유교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의 묘소 주변에는 환생을 뜻하는 젓나무를, 선비의 무덤에는 학자수(學者樹)인 회화나무를 심었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치산치수를 국가를 다스리는 근간으로 삼고 각 지방에 금산(禁山)을 정해 국용 목재의 확보를 위해 소나무의 벌목과 방화를 금지하는 송금(松禁)정책을 강화했다.

숲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근원이며 자연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삶의 보금자리이다. 오늘날은 산림녹화 사업이 어느 정도 이뤄지자 하천정비, 경지정리, 도시건설 등으로 전통 숲이 사라지고 있다.

당국에서는 가치가 있는 숲은 천연기념물 내지 지역 보호수로 지정해 보존함이 조상들의 숨결을 이어받는 뜻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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