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헌 미술가

 

[ 충청매일  ] 신문은 진위 여부를 떠나 내용을 믿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른바 활자의 위력이다. 때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거짓을 말할 수 있는 기술 덕분에 분명 거짓을 말하고도 제제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 제제나 처벌의 기준이 되는 법 또한 활자와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공정할 것 같은 믿음을 제공한다.

 그러나 법은 약자가 아닌 힘을 가진 자, 정확히는 사적 이익을 위해 힘을 행사하는 자의 편에 설 때가 많다. 법을 설계하는데 있어서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생겨난 빈틈 때문이다. 법 기술이 유능한 사람일 경우 얼마든지 법의 취지를 농락할 수 있는 셈이다. 법을 수호하기 위한 강력한 의지가 요구되지만 이는 개인의 욕망을 초월해야 하는 일로써 법률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최근에는 법률가의 오류를 해소하는 효율적인 방법에 대한 관심이 제기되고 있다. 바로 인공지능에 의한 대체다. 그러나 이 또한 아직은 인공지능의 수준을 믿지 못하는데다가 활용 가능한 수준에 이른다 해도 법률가들의 반발이 거세고 치열해서 기존의 체계를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법률에 관한 한 누구보다 해박한 법기술자들이 법적 절차에 따라 자신들의 권리를 순순히 양도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검사들의 수사권 축소로 시작된 검찰권력과 정치권력의 충돌에서 급기야 검찰권력이 정치권력을 이기고 정권을 쟁취한 것만 보더라도 법기술자를 법으로 상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일인지를 알 수가 있다. 인공지능이 보편화된 미래세상에서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직업 가운데 하나가 판사와 같은 법률가로 지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최후까지 살아남게 될 직종으로 생각되는 이유다. 

 누구나 그렇듯 법률가 역시 법지식과 기술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필요성을 증명한다. 대략 2천 명 정도의 검사들과 사법부의 판사 그리고 그곳에서 배출된 사람을 포함한 수많은 변호사들은 한 결 같이 법률지상주의와 법치주의를 동일한 개념인 것처럼 행동한다. 법은 질서 가운데 가장 하등한 질서에 불과하지만 그 법을 다루는 자신들이야말로 성 밖에 도사린 야만으로부터 성 안의 문명세계를 지켜낼 진정한 부르주아라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인간은 평등하다지만 인간이 하는 일에는 분명 우선순위가 있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률가와 같은 법 기술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와 같은 사람 혹은 그와 같은 방식이 아니더라도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방식에 익숙해진 나머지 변화와 성장을 외면하게 되면 결국 세태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근거 없는 우월감이야말로 성장과 발전을 저버리게 만드는 원인인 것이다. 그렇듯 지금의 법체계가 절대적일 거라는 믿음은 오만에 불과하다. 더구나 법은 언제나 공적 가치를 수호해야 하지만 대다수의 법률가들은 개인의 욕망을 희생하면서까지 공적 가치를 추구할 의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런 상태에서 그들 스스로가 달라질 거라고 기대하는 건 다분히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희망일 뿐이다. 

  문득 어릴 적 동네 술꾼의 한결같았던 술주정이 생각난다. "제기랄, 법일랑 개나 주라고 해라" 그가 말한 법은 도통 알 수 없는 법 자체가 아니라 힘 있는 사람과 그를 위해 힘을 보태준 조력자들을 향한 억울함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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