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헌 미술가

 

[ 충청매일 ] 인공지능(AI)이 그린 그림을 보면 사람이 그린 것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해서 머지않아 미술에서도 인공지능이 인간을 압도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창성을 뺀 능률성 면에서 보면 이미 인간을 능가한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이 독자적으로 미술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인간은 기계와 달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을 최우선하는 무목적(無目的) 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미술행위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배출하는 것이며 그 행위나 결과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만일 인공지능이 스스로 자아와 정체성에 의문을 갖는다면 그것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지능인 자연지능(Natural Intelligence)에 해당한다. 희로애락의 정서를 느끼지 못하는 인공지능이 과연 스스로를 돌아볼 이유가 있을까. 미술행위는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인식하기 위해 구안해낸 유희방식의 하나인 것이다.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때 부유층의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던 화가들은 더 이상 자신들에게 초상화를 의뢰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적잖이 당혹해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사진의 등장은 이제껏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에만 매달려온 반복된 습관에서 벗어나 사진에서는 다룰 수 없는 화가의 취향과 특성을 발휘하게 만듦으로써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현대미술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로 종래의 방식이나 사고에서 벗어나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영역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언제나 그래왔듯 변화와 발전은 스스로 각성해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외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방어적 태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출현했을 때의 반응은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새로운 것을 무용한 것으로 취급하여 애초부터 손절하는 것이다. 둘째는 새로운 것을 도입하여 현재의 가치체계를 지키기 위한 능률이나 성과를 높이는 방식이다. 셋째는 이제까지의 방식을 과감히 없애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표준화시키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첫 번째 방식을 선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미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살다보니 인공지능에 의지하게 될 미래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두 번째나 세 번째 방식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가 않다. 변화된 세상에서 살아갈 인간 자신에 대한 예측을 장담하지 못하는 탓이다. 설령 예측한다 해도 현실적 가치에 따른 생산성을 따져볼 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정서나 자아실현에 관한 사항은 고려되지 않는다.  

  영화에서나 보던 인공지능과 인간의 기억이 결합한 사이보그가 등장하게 될 것이 분명한 미래사회를 떠올리다 보면 문득 머피의 법칙이 떠오른다. 머피의 법칙은 무언가를 꺼려하기 시작하면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토록 꿈꾸던 불로장생이 가능해지면 필요 이상의 욕구나 욕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만큼 인간 자신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도 감소하게 된다. 어쩌면 더 이상 생명 탄생의 필요성이 사라짐으로써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감소를 능가하는 인류의 멸종과 같은 비극적 결말이 도래할 지도 모른다. 과연 그런 세상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확인하는 수단이자 예술로서의 미술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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