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가까운 음성의 한 할머니가 집중호우로 밭둑이 무너지고 아래로 내려가던 물이 역류를 하자 “내가 오래 살다보니 벨일(별일)을 다보는군”이라며 탄식어린 말을 했다.

옆동네에서 시집을 와 한 동네에서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이고 보니 90년을 그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순응하며 살아온 그녀임을 알 수 있다.

최근 TV보도에서도 수재상황을 인터뷰를 통해 보도하는 내용 중에는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위의 내용과 비슷한 인터뷰 내용이 있었다. “예전엔 이런 일 읍었어” “이런 물난리는 난생 처음여~”라고.

말하는 분들의 연령을 밝히면서 수재의 심각성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가끔 말하는 사람 중엔 “내가 너무 오래 살아 이렇게 험한 꼴을 보고 있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보편적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오래살고 싶어한다. 그 한 예를 들어 보겠다. 한 노인대학의 반장 후보가 공약하기를 “우리 손자가 과학자가 돼서 사람이 안 죽는 약을 개발하겠다고 하니 그 약을 우리 노인 대학생에게 전부 나눠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다.

듣고 있던 노인들이 모두 일어나 함성을 지르며 박수치고 좋아했던 사례가 있다. 말도 안되는 공약을 갖고 박수치며 좋아한 예상 밖의 노인들의 행동을 보며 다시 한번 장수에 대한 그들의 꿈을 살필 수가 있었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난 첫 번째 요인은 약이 아니라 ‘물’이라고 한다.
다각적인 차원에서 물을 잘 관리하는 것이 인간의 수명을 지켜주는 가장 큰 보배임이란 것을 이번 물난리를 통해서도 확인된 셈이다.

그런데 음성의 할머니처럼 너무 오래 살아 보지 않아야 될 것을 본다며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을 되뇌며 살아가고 있는 노인들이 농촌에는 많이 있다.

“아픈 곳도 없고, 잘 움직일 수 있으니 어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있나! 지난번엔 들에서 내려오다 넘어졌는데도 멍만 조금 들고 말았어. 어디 부러진 데라도 있어야 빨리 죽지 않겠나” “내평생 약 한 톨, 보약 한 첩 먹어보지 않았어도 이렇게 오래 살어” 하는 할머니들이 있다.

현재의 삶이 행복해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 중에는 오래도록 살아서 그 행복이 지속되리라고 믿고 기원한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게 능사는 아니다.

너무 나이가 많아 진정으로 빨리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통해 오래 살게 되면 나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오래 살다보면 음성의 할머니처럼 험한 꼴을 보게 된다. 둘째로는, 수명에 집착하다보니 결국은 노인병원에서 연명하며 살아가게 된다. 수액주사, 산소호흡기, 위관영양(코를 통해 호스를 위에까지 넣어 음식물을 공급하는 방법) 등을 통해 길게는 10년 이상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생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다. 오죽하면 잘 죽는 것도 복이라 했겠는가.

지난해 필자의 친척 중 한 할아버지가 음력 정월 대보름날 돌아가셨다. 설날 아침부터 곡기를 끊으시더니 모든 음식, 병원치료를 거부하시고는 보름 만에 세상을 뜨셨다.

그 날까지 의식의 흐트러짐이 없이 모두 정리하고 가셨다. 자식이 암에 걸린 사실을 안 뒤, 생을 마감할 정월 대보름 날을 잡아놓고는 정월 초하루부터 곡기를 끊기 시작했다는 것을 장례를 치룬 후에야 필자만이 알 수 있었다.

곡기를 끊고도 보름을 살 수 있었다. 비축해 놓은 것이 많은 사람은 한달을 가기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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