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중산고 교감

 

[ 충청매일 ] 고향 달래 강가, 이제는 서지 않는 간이역 앞에 달천이발소가 있다. 오래되어 낡은 가건물에 이발중임을 알리는 싸인볼이 조용히 회전하고 있을 뿐 간판도 없다. 삐걱이는 샤시 미닫이문을 열면 1970년대에나 보았을 이발소 정경이 펼쳐진다.  큰 거울이 있는 자개장에 180도로 젖혀지는 의자 두 개와 옛날 초등학교 운동장 수돗가에서나 보았을 듯 싶은 작은타일조각들로 만들어진 세면대에 샤워기가 하나 매달려 있다. 대기 손님을 위해서는 낡고 작은 소파가 전부인 이발소 안 풍경은 정겹다. 

 비상등처럼 요란하게 회전하고 있는 싸인볼만 없으면 이발소인지 알 수 없지만, 찾는 손님은 많다. 시골이라 노인분들이 갈만한 이발소가 흔치 않아서기도 하지만 워낙 단골들이 많다. 이발사분은 70대라 믿기지 않을 동안(童顔)에다 기술이 뛰어나고 친절이 몸에 배어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달래강을 건너 이발소를 다녔다. 자전거로 10여 분이면 닿는 이발소를 팔십이 넘어서까지 오래도록 다녔다. 

 근년(近年)에 폐와 심장 기능이 떨어져 큰병원에 두 달 여 입원한 뒤로는 혼자 이발하러 다니는게 어려워 차로 모시곤 한다. 아버지는 이발이나 목욕이나 병원 다니는 일 때문에 자식들에게 전화를 자주 한다. 어머니가 바쁜 자식들에게 사소한 일로 전화 좀 하지말라고 아버지를 타박하지만 변함이 없다. 

 우리 세대 대부분이 부모와 사근사근 정을 나누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성인이 되기전까지 가족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결혼 후에나 명절이나 가족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했지 어린시절에는 부모와 함께 한 특별한 경험이 없다. 더구나 아버지는 나의 10대 대부분 동안 원양어선을 타고 해외에 나가 계셨다. 내 기억에 아버지와 함께 한 경험은 중학교에 들어갈 때 교복을 맞추러 시내 양복점에 같이 간 것과 대학 합격 발표 때 서울까지 함께 다녀온 기억이 전부다. 유년시절에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지 못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희생과 고향 공동체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늘 어려운 존재였다. 

 달천강 고향마을을 떠나 오랜 세월 직장, 결혼, 육아와 같은 현실에 치여 정신없이 살았다. 앞만 보고 달려오며 지난 날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부모님을 챙기면서 새록새록 어린시절이 떠오르고 나 자신을 돌이켜보고 성찰할 때가 자주 있다. 

 아버지가 이발하는 동안 달래강 강둑에 서서 강에서 놀았던 수많은 추억들을 새겨보고, 이제는 폐역이 된 달천역사(達川驛舍)를 둘러보며 처음 기차를 탈 때며,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어 친구들과 부산이나 목포까지 기차를 타고 다녀왔던 추억을 떠올리곤 했다. 

 이발소의 거울과 자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유년시절의 추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발소 문밖을 나와 달천역을 지나 강쪽으로 걸으면 그 옛날의 풍경들이 한꺼번에 다 다가왔다. 

  안개 낀 겨울 아침 시내버스를 기다리던 교복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늦은 밤 막차에서 내려 강둑을 걸으며 보았던 밤하늘의 별들과 강물에 비친 달빛, 사과나무에 매달린 사과와 논에서 익어가던 곡식들 냄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로웠다. 가난했지만 꿈이 많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이만큼 살 수 있었고 남보기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키운 고향과 지난날들을 연결해주는 달천이발소가 아버지와 함께 그 자리에 오래도록 변함없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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