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중산고 교감

 

[ 충청매일 ] 지난 주말, 오랜 친구들과 변산반도와 목포 일대를 둘러보는 남도 여행을 다녀왔다. 폭설과 한파로 궂은 날씨였지만 마음 편한 친구들과 함께 했기에 행복한 시간이었다. 친구들과는 대학동기로 만나 40년 가까이 우정을 나눈 사이다. 함께 한 친구들은 35년 전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할 때 갈 곳 없는 나를 자신들의 자취방에서 살 수 있도록 품어준 이래, 식구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함께 한 존재들이다. 

 20대 초반 가난했지만 꿈조차 가난할 수 없었던 그 청춘시절, 서울 성북동 산비탈 월세방에서 동거동락하던 그 시절을 우리는 와오원 시대라 부른다. 친구들을 동물에 빗대어 개구리, 오리, 원숭이와 닮았다 놀리던 별명을 따서 그 후미진 방을 와오원이라 불렀다. 많은 지인들이 들락거리며 추억을 쌓았던 와오원 시절이,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황금시기였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할 때 당시 집안형편을 생각하면 서울살이는 당치않은 일이었다. 대처(大處)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앞서 서울로 보내달라는 철없는 자식의 요구를 말없이 수용했던 부모님은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하느라 가랑이가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셨다.

 과동기 둘과 선배 한 명이 살던 비좁은 방에 나까지 더해 넷이서 부대끼며 가난한 살림을 사는 동안 매일같이 드나들던 식객들이 많았지만 결핍이나 협소함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매달 월세가 밀리고 쌀이 떨어져 라면을 주식으로 살았지만, 우리들의 내일이 늘 가난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희망이 있어서였던가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우정을 나누고 새롭게 배우며 꿈을 키우던 시절이었다. 

 아지트와 같았던 그 집에서 친구들과 많은 고민을 나누고 공부를 하며 세상을 배우고 미래를 준비했다. 그때는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친구들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없어 아쉬웠지만 외로울 틈이 없어 좋았다. 네 식구가 북적거리며 살면서 네 명의 지인들이 찾아와 함께 하는 술자리가 잦아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만나 교류하며 새로운 경험과 생각을 나누며 내 사고의 틀을 확장시킬 수 있었고, 늘 새로운 것들을 배웠다. 그 시절 함께 했던 친구들 덕에 어느 하루도 정체될 수 없었고, 어느 한 순간도 꿈꾸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부모님의 기대만큼 세속적인 성공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기에 불안하고 고뇌가 깊었지만, 늘 사람들과 관계 맺고 배우며 하루하루 버티고 이겨내는 성장의 시간이었다. 각양각색의 꿈을 꾸고 나누었기에 지치거나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슬픔이나 절망도 나누면 쉽게 잊고 이겨낼 수 있고 아름다운 추억도 쌓이면 큰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잘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제각기 성북동 골방의 문을 열고 세상에 나와 자신의 일을 찾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나아 기르며 한 시절을 행복하게 살았다. 바쁘게 살며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같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당당하게 제몫을 하며 살고 있다는 친구들의 소식을 듣고 뿌듯해하고 가끔 만나 안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응원하곤 했다. 이제는 우리가 낳은 자식들이 그때의 우리만큼 나이를 먹어 세상에 내보낼 만큼 인생의 한 고비를 넘었다. 남은 인생은 또 어떻게 살아갈까? 행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아는 나이가 되었고 아직도 꿈꾸는게 있으니 남은 인생도 그리 힘겹지는 않으리라. 살아온 날들이 허튼 시간이 아니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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