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 충청매일  ] 한국의 활쏘기는 한국에만 있는 스포츠입니다. 다른 언어를 경험한 적이 없는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서기 2000년 이후에 갑자기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언어의 조명을 받게 되었고, 뒤이어 학계에도 보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또렷이 드러나는 한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용어가 외래어로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제가 『한국의 활쏘기』를 쓰면서 용어를 최대한 우리말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활을 분류할 때도 ‘나무활, 덧댄활’이라는 식으로 용어를 만들어 썼습니다. 그랬더니 불과 얼마 안 되어 ‘목궁, 복합궁’이라는 식으로 이름이 바뀌어 쓰이더군요.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굳이 있는 우리 말을 두고 한자나 영어로 바꾸려는 심리는 우리의 사회에 뿌리 깊이 드리운 우리 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외국 학문의 전통에 대한 사대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대주의에 빠지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왕따 당하거나 이상한 사람이 되죠. 

 우리에게는 이런 경험이 많습니다. 국어학에서도 모든 용어가 한문으로 대체되고, 순우리말이 현실의 문법 용어에서 증발해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전통문화의 많은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전통 활쏘기도 그런 영역이어서 학문화가 진행될수록 우리식의 사유와 언어는 점차 밀려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 우려가 논문을 비롯한 발행물 곳곳에서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근래에 한문으로 된 활 고전이 발굴되면서, 그것을 해석하는데 글자의 뜻을 옥편에서 구하려는 행위입니다. 외국어는, 낱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통문장입니다. 특히 생략이 많은 한문에서는 옥편 밖의 의미가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옥편에 국한시켜놓고 해석하면 정말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이 됩니다. 『정사론』이라는 조선 말기 무인이 쓴 책은 정량궁 쏘는 법인데, 알다시피 정량궁은 맥이 끊겼죠. 그런데 오늘날 남은 유엽전 쏘는 법으로 그것을 번역하는 것은 한계가 뻔히 보이는 일입니다. 게다가 그 책의 내용을 현실에서 실제로 복원하여, 그것을 당시 무인들이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차라리 무협 소설만도 못한 판타지 만화 수준이죠. ‘언어’로 접근하는 어떤 ‘사실’은, 결코 언어가 사실을 앞설 수 없습니다. 

 언어는 영혼의 더듬이입니다. 언어가 다르면 그 겨레의 정신을 제대로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 활이 제대로 자신의 내용을 전하려면 우리말에 담겨야 합니다. 어쩐지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남의 말은 어딘가 쪼이거나 헐렁합니다. 그런데도 자꾸 남의 말을 기웃거라는 것은, 우리말에 대한 무지이거나 허영심 때문입니다. 학문이라면 뭔가 그럴 듯한 포장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불안이 이런 허황된 짓을 부추기는 것이죠. 

 한국의 활쏘기는 지금껏 나온 글만으로도 충분히 모욕을 겪었습니다. 남의 옷을 입고 남의 가락에 맞춰 충분히 놀림을 당했습니다. 용어부터 우리말로 돌아와서 활쏘기에 가득한 우리 영혼을, 호기심 가득한 세계인들 앞에 드러낼 때가 왔습니다.

  한국의 활쏘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체육으로서는 국제대회가 없고 국내대회만 있어서, 동호인들 빼고 관심이 없습니다. 목숨 걸고 달려들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깊이 있는 학문 연구가 어렵고, 학문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활쏘기의 깊은 세계를 잘 모릅니다. 말과 체험 사이에서 무언가 계속 겉도는 것이 한국의 활쏘기 연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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