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헌
미술가

 

[ 충청매일] 어쩌다보니 작업실 곳곳에 잡동사니가 가득하다. 어려서부터 온갖 것들을 집에 들이는 바람에 수도 없이 잔소리와 꾸지람을 듣고 자랐지만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다. 대체로 내가 쓰던 물건들이지만 남이 쓰다버린 물건도 적지 않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연민을 느낀 까닭이다. 

 오래된 나무가 베어진 그루터기를 볼 때면 나무가 하나의 생명체로 느껴지면서 그것이 간직한 본래의 의미를 없애버린 것에 죄의식을 느낀다. 그렇게 잘려진 나무가 땔감이 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모습을 볼 때쯤이면 죄의식은 까맣게 잊은 채 가로세로 일정한 크기의 규칙과 질서가 만들어내는 경이로움에 빠지거나, 잘 깎이고 다듬어져 새롭게 탄생한 책상이나 의자의 생김은 물론 만든 사람의 수고와 내력에서 감동을 느낀다. 그러다가 그 또한 용도가 다해 쓰레기장에 내다버리는 순간에 이르면 문득 잊었던 연민이 되살아난다. 나와 다르지 않은 결코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동질감이 느껴진다. 그것들의 운명에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내손에 피를 묻히는 심정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가끔씩 작업실에 들른 아내가 걱정 어린 투로 이 많은 잡동사니들을 대체 어찌할 작정이냐고 묻는다. 아내의 핀잔이 아니더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들과의 관계가 영원할 수 없음을 직감한다. 제한된 시간은 민첩한 판단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내게로 와 꽃이 되어주기만 한다면 나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너의 이름을 불러줄 용의가 생겨난다. 비로소 나를 대하는 마음과 기분으로 그것들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의 용도가 폐기된 채 소각장으로 가게 될 그것들의 운명에 개입하는 일이 마치 방치된 자신을 구제하는 것과 같이 느껴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것들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기만 하면 본래의 모습이 유지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그것들에 마음이 갔던 이유가 동병상련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것들과 나는 그렇게 서로에게 작업의 소재와 대상이 되어주는 만큼 본래의 의미 그대로 지속하게 해주는 관계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훨씬 이전부터 사용하신 밥그릇이나 떡메, 그 동안 써왔던 화장품용기, 먹고 남은 빈 영양제 병, 빈 택배박스나 생수병, 맥주 캔, 교체되어 버려진 교실의 마루 등 알 수 없는 인연에 이끌려 모아진 그것들은 특별한 계획도 없이 지금도 작업실 곳곳에 쌓여 있다. 누군가는 우스개삼아 버텨내기만 하면 언젠가는 골동품이 되어 값이 치솟을 거라고 하지만 내 귀엔 그 말이 고대 이집트의 미라처럼 박물관을 채우는 소품 정도로 인식하라는 말로 들린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보고 한 때의 소품 정도로 인식한다면 나는 그걸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 재활용이나 업싸이클이 아닌 그것들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나 역시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인 것이다. 피라미드 속의 미라 뿐 아니라 식물이 꽃을 피우는 것도, 자식에게 과다한 애정과 집착을 보이는 것도, 이제껏 목을 매온 작업마저도 따지고 보면 모두 다 영원하고 싶은 욕심에서 생겨난 일이다. 삼라만상이 그러할진대 비록 그것이 허망한 일이란 걸 깨우친다 해도 멈출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욕망이 멈춰 서지 않기만을 바라는 결코 소심하지 않은 주문을 외워댄다. ‘존재한다. 고로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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