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꿈세상 정철어학원 대표

 

[ 충청매일  ] 베트남 남부 휴양도시 달랏(Da Lat)을 다녀왔다.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기대하며 떠난 여행이다. 하지만 달랏 여행의 즐거움 뒤로, 나는 삶을 돌아보며 많은 상념에 빠졌다. 달랏은 가는 곳마다 비닐하우스가 바다처럼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어디서 보아도 산비탈에 즐비한 비닐하우스가 유난스러웠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김진국, 대구 효성여대에서 화훼 장식학을 가르치던 김진국 교수는 1990년대 초반 동남아 10개국을 2년간 돌아다니다가 1994년 달랏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현지 관공서와 담판을 지어 산비탈 돌산 개간을 허가받았으며, 움막을 짓고 삽과 괭이로 바위를 깨고 돌을 날랐다. 8년 동안 어깨가 으스러지고 손바닥이 까지는 험난한 작업으로 5천평을 계단식 밭으로 개간했다.

 첫해 한국에서 가져다 심은 난(蘭)과 장미 2만 주를 재배에는 성공했지만 대부분 도둑맞았다. 그동안의 노력이 허사가 되어 황망했다. 그럼에도 김진국 교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해엔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안개꽃을 심었다. 해발 1천500~1천700m 고랭지라 품질이 최고였고, 5~11월 우기(雨期)에도 비닐하우스 ‘비 가림 재배’로 연중 생산하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1년에 한두 번만 수확하던 현지인들은 연간 네 차례나 수확하는 김 교수를 보고 따라 했다. 해가 갈수록 비닐하우스가 달랏의 들판을 채웠고, ‘비닐하우스 바다’는 달랏의 상징이 됐다. 밤에는 비닐하우스 불빛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전깃불로 꽃들의 개화기를 조절하는 선진 농법이 보급된 것이다.

 ‘한국에서 온 미친 노인’은 점점 ‘달랏의 보배’가 됐다. 김진국 교수는 국화와 카네이션의 일본·싱가포르 수출길도 열었다. 그러는 사이 달랏의 화훼·채소 농가는 부유해졌고, 집들은 그림엽서처럼 예쁘게 변해갔다. 농법 전파 후, 베트남 1인당 평균 GDP 대비 달랏의 GDP는 4~5배에 이른다고 한다.

 그의 도움으로 달랏대학교에는 2005년 농과대학, 2006년 난(蘭) 연구센터가 만들어졌고 2004년엔 한국어학과를 개설해 작년 봄까지 졸업생 220여명을 배출했다. 달랏대는 지금 한국의 26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달랏대 안에 짓는 한국·베트남 학술원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60만 달러를 모금할 계획이었으나 15만 달러밖에 모이지 않았고 기자재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요. 지금 한국에 가면 노인 취급을 받겠지만 여기선 내가 필요한 사람들과 할 일이 아직도 많아요." 그는 제2의 고향 달랏에 뼈를 묻을 생각이라고 했다. 

 달랏 사람들은 김진국 교수를 ‘파파’라고 부른다. 베트남 명문 달랏대학교의 Le Ba Dung 총장도 "나는 파파가 둘이다. 한 분은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고 다른 한 분은 파파 킴이다"라고 말한다. 총장뿐만 아니라 동양학부 교수들도, 대학생들도 그를 보면 "파파"라고 부른다. 그는 상징적으로 달랏의 아버지가 되었다.

  인생 2막으로 편안함을 택할 수도 있었을 김진국 교수는 제2의 도전을 시작했다. 김진국 교수의 도전과 그의 땀은 달랏 시민에게 단비가 되었다. 많은 사람에게 풍요를 알게 해주었고 웃음과 행복을 선물했다. 그의 삶은 그렇게 그의 몫을 하였다. 지난 60여 년의 삶이 스친다. 나는 나 잘살기 바쁘고, 내 식구 내 자식 챙기기에 급급했다. 이제 남은 생에, 내가 세상에 갚아야 할 나의 몫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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