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 충청매일 ] 한 달 남은 달력을 보며 지난 일 년이 우수했는지, 아니면 우스웠는지 나의 성적표가 보인다. 지난해와 똑같은 환경, 똑같은 시간이었지만, 지난 일 년은 낙제를 겨우 면한 성적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시작한 대학교 1학년 학점이 시들시들(C, D, C, D)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숨고 싶어진다. 로맨스로 가득했던 새내기 대학생은 그때부터 대학 생활이 두려워 가슴에 얹혔다. 그 충격으로 나의 뇌는 그제야 바닥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청춘의 시간표는 내 삶의 방향을 내가 정하고 내 시간을 스스로 계획해서 살았다. 결혼하면서 남편이 생겼고 아이들이 생겨나니 나의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되었다. 이인삼각처럼 서로의 삶이 묶이게 되면서 방향도 속도도 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배에 타고 변화무쌍한 큰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내리기 전까지는 냉혹하게 삶을 지휘하는 마법사를 잘 다스려야만 한다. 항해에 들어선 선장은 늘 잔잔하고 평온함만을 기도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마흔 나이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나이이다. 지독한 상실의 고통에서 혼자 애쓰느라 배가 뱅뱅 돌기도 하고, 노를 빠뜨리기도, 배가 뒤집기도 했다. 나를 보호해 줄 방패 없이 내 힘만으로 다시 서야 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흘려보냈던 회색빛 시간은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했다. 엄마로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어도 ‘나’라는 삶은 제일 낮은 점수를 받았다. 차가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은 소리가 나지 않듯이 마흔 수업을 드러내지 않고 맞이한 수업은 참으로 혹독했다. 

 ‘마흔 수업’의 저자 김미경은 사십 대라는 나이가 인생의 성적표는 아니라고 말했다. 이 말에 공감했다. 다행히 지난 슬픔이 너무 늦지 않게 인생 마법사의 변검(變劍)에서 벗어남을 감사하고 나는 새로운 삶의 자리에서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나’를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오십에 이른 나이가 되어 내 인생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되니 멈췄던 인생의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냉혹하고 가슴 저미는 처연함도 전반 생에서 쌓은 인생의 축적이 있었기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러한 안목은 단기간에 습득할 수 있는 지식과는 다른 절대적인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결혼도 누구의 삶도 ‘전형적’이지 않다. 전형적인 것을 굳이 찾으라면 누구나 늘 행복하지도 늘 불행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 학년을 넘긴 내 나이, ‘예순 수업’에는 성적표를 받을 수 있는 나이인지 묻고 싶다.  대학 때 받아보았던 시들시들한 성적표보다는 나아졌는지, 아니면 권총(F) 학점을 받을 것인지 궁금해져 온다.

 성적표는 결과물이다. 타인이 평가하는 성적은 가점(假點)이 섞여 있어 온전한 점수가 될 수 없다. 누구나 자기 성적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에게 내밀기가 어렵다. 늘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지 못한 내가 다시 출발선에 섰다.

 ‘예순 수업’은 우스웠더라도 마지막 찬스인 ‘기억 수업’에 우수한 성적을 내는 것이 바람이다. 누구도 물어보지 않을 성적표이지만, 이 세상에 왔다가 돌아갈 때, 그래도 조금은 기억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이제, 온전히 나 한 사람이 살아가야 할 삶만이 남았다. 바로 ‘나’에게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남겨진 인생길에 나와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과 ‘나눔’으로 함께 기억되고 싶다. 이제 ‘기억의 성적표’는 재시험을 받지 않도록 살아갈 계획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