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대 경영학과

대마도는 일본보다 한국이 가깝고 조선 초기까지만 하여도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보다 100년 먼저 항구를 열어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고 자국화하여 강대국으로 부상하자 대마도는 일본에 붙었다.

천하를 통일한 일본에서 대마도는 조선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조선통신사의 길이었다. 그러다가 일본이 성장하자 조선통신사의 길도 끊어지고 임진왜란의 통로로 바뀌었다.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 치러 갈 테니 길을 비켜달라. 결국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이기고 만주 땅을 지배하였다. 힘이 강해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쓰시마해전으로 대승하고 조선의 지배권까지 확보했다.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를 동경으로 데려가 대마도주의 손자와 결혼시켰는데, 덕혜옹주는 정신병에 걸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했다.

대마도는 제주도의 반이 안 되는 작은 섬, 섬의 90% 이상이 편백나무, 삼나무 등으로 우거졌고 인구가 2만8천명에 불과하다. 대마도에 뭐 볼 게 있다고 가냐고 한다. 맞는 말이다. 보이는 것이 산과 바다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를 알고 보면 볼 게 너무 많다. 대마도는 일본으로서는 천혜의 보고다. 대륙으로 해저터널이 생긴다면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연결할 것이다. 대마도에는 지진도 없다.  공기가 좋기로는 최상이다. 우리가 독도에 볼 게 있어서 가는가? 독도의 의미가 군사적으로 역사적으로 크기 때문에 거센 풍파를 마다하고 독도에 상륙하며 거기에서 잠시 머무르지만 상륙하기만 하여도 큰 행운으로 여긴다.

대마도에는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물씬 풍겨 있다. 누가 그 흔적을 찾아볼 것인가? 대마도는 삼한시대 한반도의 마한과 마주한다고 하여 대마도(對馬島)라 하였다. 대마도는 상도와 하도 2개의 섬으로 되어 있어  일본에서는 대마도를 대마이도(對馬二島)라 했는데 대마를 생략하고 쓰시마라고 했다 한다. 

대마도의 북단은 한반도의 부산과 49km 떨어져 있고 대마도의 남단은 일본 본토의 후쿠오카와 138km가 떨어져 있다. 대마도주는 조선이 강하면 조선에서 관직을 받았고, 일본이 강하면 일본에서 관직을 받았다. 

대마도는 산이 험하고 밭이 없어 농업이 주업인 시대에는 항상 식량이 부족했다. 부족한 식량의 대부분은 한반도에서 가져갔다. 

2만8천여명이 거주하는 대마도, 연간 26만 방문객 중 한국인이 20만명을 넘는다. 대마도에는 한국의 역사가 남아  있다. 그 흔적을 지운다고 지워지겠는가? 우리가 가서 찾아보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관리는 그들이 하지만 가서 머무르고 즐기는 것은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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