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공예인 뜨거운 손을 찾아서] 권현규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단청장(丹靑匠)

제천시 신륵사 학술조사 연구로한국 단청 발전 계기 마련 자부심
불화 자신만의 초안 제작하지만단청은 전통 원형 계승·복원해야
용화사 작업 통해 청주시와 인연

불화교본 작업중인 권현규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단청장(丹靑匠).
불화의 초안에 대해 설명하는 권현규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단청장(丹靑匠).
권현규 단청장이 그린 청주시 용화사 불전의 불화.
권현규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단청장(丹靑匠)이 작업한 청주시 용화사 단청과 벽화.
권현규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단청장(丹靑匠)의 불화.
권현규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단청장(丹靑匠)의 불화.
권현규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단청장(丹靑匠)이 작업한 청주시 용화사 삼불전.

[충청매일 김정애 기자]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지나치게 무리하면 탈이 나는 경우가 있다. 10여년 전 충북도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신륵사(대한불교 조계종 법주사 말사) 극락전 벽화와 단청에 대한 학술조사와 신륵사 내외부 단청, 벽화의 초안도(草案圖)를 복원하고, 퇴락해 가는 일부 벽화에 대한 현황 모사 작업 등 책임연구원으로서 직접 진두지휘한 어려운 작업 과정의 후유증이 몸으로 왔다. 권현규(71)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단청장(丹靑匠) 기능보유자가 건강을 잃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권현규 단청장은 이때의 무리한 작업으로 건강을 잃었지만 "벽화와 단청은 수많은 장인들에 의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우수한 불교미술임에도 불구하고 탱화에 비해 학술적인 연구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 조사를 계기로 우리나라 벽화와 단청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는 단초가 되었다"며 한국 단청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당시 이 조사 과정에서 단청장은 신륵사 극락전 외벽의 벽화가 사명대사의 일본행을 그린 그림인 ‘사명대사행일본지도’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단청은 사찰이나 궁궐의 목재에 음양오행 사상에 따라 청, 적, 황, 백, 흑 5가지 색으로 무늬를 내고 채색한 것으로 불교신앙의 내용을 함축해 그림으로 표현한 불화와 함께 부처를 모셔놓은 사찰의 공간을 장엄하게 표현해 준다.

권 단청장이 처음 이 작업에 입문한 것은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갔다 탱화를 보고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아름다움에 매료된 인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무슨 안목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가슴 한쪽에 큰 호기심과 감동을 느낀 것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20대 중반, 앞으로 살아갈 길에 대해 번민하던 중 아버지가 한국전쟁과 관련 있어 연좌제라는 꼬리표를 달게 돼 공무원은 못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회생활 하기는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게 좌절하다 문득 어린 시절 탱화에 대한 감흥이 떠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스승을 찾아다녔으나 소문을 듣고 가보면 아니었다. 1970년대 무렵 대전에서 살 때 하루는 판잣집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에 단청을 잘 그리는 대장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속는 셈 치고 찾아가 보았다. 무작정 인사드리며 단청 배우고 싶다고 매달렸다. 김용준 선생이었다. 첫 스승인 셈이다. 선생은 국가문화재청이 위탁하는 보수공사를 주로 맡아 했다. 처음 따라간 곳이 백제 부여의 수북정이었다. 이 무렵만 해도 문화재에 대한 중요성이 없어 이미 좋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데, 퇴색됐다는 이유로 다 지우고 새로 그리라는 것이 작업의 주문이었다. 수북정의 그림을 보고 보통솜씨가 아닌 사람의 그림이라고 생각했으나 지워라 하니 아깝지만 지워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군에서 지시한 것인지, 문화재청의 지시였는지 기억은 없지만 참 한심했어요. 그때 정자에 그려졌던 그림이 인제 허백련의 그림이라는 것을 20년 후에 알고 더욱 안타까웠죠."

이 당시 하루 품값이 2천 원이었다. 단청장은 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 그림을 배우고 돈도 벌었으나 작업은 막노동에 가까웠다. 그러다 단청장은 박동수 선생에게 탱화를 배울 기회가 생겼다.

탱화는 불교신앙을 그림으로 표현한 불화지만 종이와 천에 그리는 것이어서 좀 더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도난이 용이하고 불이 났을 경우 가정 먼저 피해를 입어 좀 더 귀하게 대접받는 불교미술이 되었다.

불교미술 복원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단청이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 벽화, 탱화 등 모든 것을 다 할 줄 알아야 했다. 권 단청장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국 어디라도 스승을 찾아다니며 배우고 또 배웠다. 여기에 성실함이 추가되어 사찰 스님들에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사찰 스님들이 좋아해 줬어. 믿을 수 있고 예의가 있다고. 고생을 많이 했으나 돈도 들어오기 시작해 생활에 도움이 되기 시작했지. 잊을 수 없는 스님이 계셔. 영봉 남인식 스님이라고 화승(불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스님)이었어.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이셔."

권 단청장이 영봉 스님을 특히 존경한 것은 탱화 작업에 있어 우리의 전통방식을 따라 전승하되 자신만의 초안(草案)을 만들어 그린다는 점이다. 영봉 스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초안을 내지 않고 이미 누군가 그린 것을 베껴 그렸다. 스승님을 만나고 배운 후부터 비로소 자신만의 초안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불화를 그리더라도 똑같이 베끼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단청은 전통 문양과 예술이기 때문에 몇 백년 전의 단청을 원형대로 계승하고 복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 현대인의 감각으로 창작해서는 안되지. 하지만 탱화는 불교신앙을 이야기로 표현하는 작업인 만큼 자신만의 솜씨가 드러나야지."

단청장이 청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3년 청주시 사직동 용화사 단청 작업을 맡고 부터다. 처음에는 대전에서 첫차 타고 와 출퇴근했으나 한두 해에 끝날 것 같지 않아 아예 청주에 주거를 마련해 청주사람이 됐다. 이후 명장사, 관음사, 보현사 등 청주의 모든 사찰 단청작업을 맡게 됐다. 년이 됐다.

그는 단청 분야의 문화재수리기술사로도 활동하며 후학을 많이 양성했지만 뒤를 이어 단청을 본업으로 삼는 제자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만큼 단청이 고단한 작업이란다.

제천 신륵사 작업 이후 뇌경색이 와 걷는 것이 불편한 단청장의 마지막 숙원은 불화교본을 만드는 것이다. 현재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불화교본에 담길 내용은 한국 탱화의 특징, 전통방식의 단청 색감, 입체3법에 대한 용어정리 등이 담기게 될 것이다. 권 단청장은 종종 국가문화재가 건물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그려 놓아 국적 불명의 단청이 되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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