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철 서원대명예교수(한국지명학회, 국어사학회 고문) ‘미호강’ 명칭관련 특별기고
문자는 언어를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해
문자의 환영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박병철 서원대 명예교수(한국지명학회, 국어사학회 고문)
박병철 서원대 명예교수(한국지명학회, 국어사학회 고문)
훈민정음 언해: 한글 창제 이후의 문자 자료.
구결이 달린 (고려시대) : 한글 창제 이전의 문자 자료.
구결이 달린 (고려시대) : 한글 창제 이전의 문자 자료.

 

[충청매일 김정애 기자] 미호강은 충청의 젖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강줄기이자 7개의 지방 자치단체가 포함된 넓은 유역면적을 자랑한다. 지난해 지역민의 숙원이었던 미호강으로의 명칭 변경이 이뤄져 수질오염이 개선된다면 미호강은 이름처럼 아름다운 강으로 길이 보존될 수 있을 터다. 하지만 미호강 명칭을 둘러싸고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명칭 변경을 주장하는 일부 여론이 있다.

충청매일은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넓은 유역면적만큼이나 명칭 변경에도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만큼,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한다. 한국지명학회와 국어사학회고문으로 국가지명위원회, 국어심의위원회 위원을 역임한 박병철서원대명예교수의 ‘미호강’ 명칭 관련 글을 여덟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글>

-목차-

<1> 합리적인 지명 연구를 위한 전제 1: 언어와 문자

<2> 합리적인 지명 연구를 위한 전제 2: 지형과 지도

<3> '미호' 의 원초형 '미꾸지' 명명의 배경

<4> '미호' 의 원초형 '미꾸지' 의 생명력

<5> '미꾸지'의 후부요소 ‘꾸지(<구지<곶)’의 한자표기 :‘串’에서 ‘湖’로

<6> '미꾸지’의 전부요소 ‘미’의 한자표기 :‘彌’에서 ‘美’로

<7> '미곶'의 부상과 '동진'의 쇠퇴

<8> 미호강 명칭 ‘미호’는 일제 잔재일 수 없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는 약 7천개 내외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표기하는 문자는 30여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중국어라는 언어는 한자를 문자로 삼고 있으며 스페인어와 영어는 로마자를 문자로 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중국어지만 현재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문자는 로마자이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그리스문자 그리고 에트루리안 문자를 배경으로 생겨난 로마자는 로마에서 출발, 유럽을 뛰어넘어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그리고 아시아 일부 국가에 이르기까지 사용하는 인류의 보편문자가 되었다.

로마자는 로마의 언어 즉 오늘날 이탈리아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지만 문자를 갖지 못했던 국가들은 이 문자를 빌려 자국어를 표기하였다. 로마자는 로마의 언어를 표기하기에는 적절할지 모르나 같은 계통의 언어인 인구어를 표기할 때도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정치·경제는 물론 사회·문화적으로 로마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은 Ė, Ć, Ď, Ő 등과 같이 보조부호가 들어간 글자와 Œ, Ɔ, Ȿ, Ɐ 등과 같이 일부 글자를 변형하면서까지 로마자를 채택하였다. 심지어 중앙아메리카 국가들과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은 자국의 고유문자가 있었음에도 이를 버리고 로마자를 채택하였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한글을 주된 표기 수단으로 삼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 로마자나 한자를 활용하고 있다. 한글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의 문자라고 여러 언어학자들이 극찬하는 매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이다. 이런 훌륭한 문자를 배경으로 우리 민족은 아주 짧은 기간에 문맹이 거의 없는 세상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문자, 한글의 호사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1443년 훈민정음 창제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오랜 기간 우리나라의 공적 문자는 한자였으며 한글은 보조적인 위치에 머물러 왔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조정의 공적 문서는 한자를 활용하여 중국식 한문으로 작성되었고, 지방 관청의 중하위급 관리들은 한자를 활용하여 우리말의 질서에 따라 이두로 문건을 작성하였다.

필자는 1991년 나포리동양학대학 한국학 강의 교수로 1년간 이탈리아에 머무르면서 이탈리아어와 로마자 간에 괴리가 크지 않음을 경험하였다. 영어의 경우 ‘A’를 단어에 따라 [a]로 발음하기도 하고 [ə] 또는 [æ] 등으로 발음하지만 이탈리아어는 언제나 [a]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어 사전에는 영어사전과 달리 발음부호가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2001년 슬라브어권 최고의 명문대학 프라하의 찰스대학에 강의 파견 교수로 갔을 때 나는 또 로마자에 대한 진실과 접하게 되었다.

체코어 또한 이탈리어와 계통을 같이하는 인구어이지만 로망스어군과 슬라브어군의 차이로 인하여 로마자에 각종 부호를 활용하여 자국어를 표기함을 목격하였다. 특히 체코의 로마자 ‘Ř’은 한국어로 [르즈] 정도의 발음인데, 체코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필자로서는 문자가 지녀야할 일자 일음의 원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R’에 보조부호를 붙여 어떻게 저런 발음과 대응시킬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인류가 만든 문자 중 가장 성공한 표음문자인 로마자도 세상의 언어를 완벽에 가깝게 표기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훈민정음 창제 이전은 물론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이두야말로 한국어를 그 대강만 그려냈을 뿐 실체에 근접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우치게 되었다. 만약 이두를 비롯한 한자 차용 표기가 한국어를 전면적으로 표기하는데 적절한 문자였다면 훈민정음은 창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도 인식하게 되었다.

갑오개혁과 더불어 한글이 법적 지위를 확보하기 이전까지는 한글보다 한자가 주된 표기 수단이었기 때문에 지명도 한자로 표기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지인 ‘삼국사기 지리지’와 조선전기 최고의 명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모든 지리지와 지도에 올라있는 지명은 대부분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순우리말 지명을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려 표기해 온 역사는 매우 오래이기도 하려니와 이러한 방식은 최근까지도 존재해온 엄연한 사실이다. 예컨대 미호강의 한 구간을 지칭하여 ‘까치내’라 하는데 이를 한자의 새김에 의존하여 ‘鵲川(작천)’이라 표기한 것이나, 오늘날 ‘복대동’의 속지명 ‘짐대’를 음을 빌려 ‘卜大(짐대)’라 한 것이 그 예이다.

우리나라에서 한자로 표기된 단어와 문장을 읽을 때, 이른 시기에는 음으로 읽기도 하고 새김으로 읽기도 하였다. 이는 오늘날 일본에서 ‘東京’은 음으로 읽어 [도쿄]라 하고 ‘大坂’은 훈으로 읽어 [오사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일본은 음독과 훈독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한글 창제 후 언해가 일반화되면서 새김으로 읽는 방식은 소멸되었고 음독의 방식만 남게 되었다.

한국 지명의 역사에서 순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 그 고유성이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한자를 새김으로도 읽던 방식이 쇠퇴하고 음으로만 읽게 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는 오랜 기간 한자를 표기방식으로 삼았던 업보로 우리나라 지명이 지닌 슬픈 역사이다.

성공적인 지명 연구를 위해서는 문자는 언어를 충실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과 나아가 문자화 과정에서 상당한 왜곡과 손상이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는 혜안을 갖추어야 한다. 즉 언어와 이를 표기한 문자에 대한 식견이 전제되어야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 더불어 문헌에 오르지 못하고 구전되어온 속지명도 탐구대상에 포함 시켜야 함은 당연한 연구 태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연구 대상이듯 문자화된 지명어든 구어에서만 활용된 속지명이든 차별 없이 연구해야 할 소중한 우리의 언어문화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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