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연초록 속살을 드러내며 분열과 분열을 거듭하는 산산으로 향한 길엔 흰 조팝나무꽃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사열병처럼 서있다. 산벚꽃 점점이 구름 꽃으로 피어오르고 응달 산기슭엔 올해도, 아! 어김없이 진달래 피어 보랏빛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하다.  하여 나는 오늘 다시 우암산에 오르기로 했다. 전통혼례 올리는 후배의 향교 봄맞이 이벤트도 볼 겸, 오늘 코스는 향교 뒤편으로  토성을 밟고 오르는 길을 택했다. 오르는 내내 나는 산이 무슨 야외 헬스장이나 체력 체험장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등산로 운운하며 설치한 산행 시설도 필요이상으로 점점 늘어만 간다. 손바닥만한 해발 388m의 산에 산세하고는 궁합이 맞지 않는 시설물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뿐이랴. 산을 가르며 뒤로 큰 길이 나고 그곳을 따라 신도시가 급격히 형성되면서 이제 우암산을 여지없이 가두는 꼴이 됐다.

나는 우암산 달동네에서 태어나 산속에서 유년, 청년기를 다 보냈다. 지금처럼 나무가 많지 않았던 내 악동시절, 우리는 우암산 꼭대기에서 집 앞까지 한번도 안 쉬고 뛰어내려와 씩씩거리며 웃곤 했다. 소년시절 봄이면 노란 셔츠를 입고 지금의 관음사 옆길 바위산을 타고 올라앉아 기타를 뜯으며 화음을 모았고 친구생일에도 야외전축을 들고 산으로 들어 ‘톰 존스’나 ‘C.C.R’을 올려놓고 마구 몸을 흔들어대며 악을 쓰곤 했다. 여름비가 내리고 나면 우암산 잡버섯으로 날궂이 버섯찌개를 끓여내고 밤이면 삵이 내려와 닭장을 넘보기도 하고 부엉이가 들창 문 앞까지 다녀가곤 했던 곳….

우암산은 또한 곳곳에 부처가 머무른 처처불소(處處佛所)의 영산이었다. 신라의 서울 경주를 본떠서 서원소경을 세운 사람들은 경주 남산 모양으로 가꾸기 위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불교가 한창 융성하던 고려시대에는 우암산 일대에 200여 군데가 넘는 작고 큰 사찰이 산재해 있었다하니 산이 곧 절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우리는 어린시절 쉽게 폐사지( 廢寺地)의 흔적을 보곤 했는데 특히 깨어진 법당 기와 파편은 어느 곳에서나 널려있어서 내려올 때 몇 개씩 주워오면 어머니는 그걸 갈아 그릇을 닦는데 쓰곤 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산이 돼 살았다. 아니 청주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진산 우암산에 기대어 살았다.

조선시대에 백두대간체계를 정리한 산경표(山徑表)로 보면 우암산은 속리산의 정기를 받은 산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한남금북정맥은 속리산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충북과 경기 일부지역까지 그 기운을 뻗쳐 작고 큰 산자락을 깔았다. 속리산! 고찰 법주사를 품에 안고 있고 예로부터 나라가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산제를 올렸던 그런 신성한 산이 아닌가. 그 기운을 타고 내려오던 산길은 지금 곳곳에서 잘리고 파헤쳐져 신음하고 있다. 그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암산 뒤로 금을 그은 우회도로여서 나는 이곳을 달릴 때마다 늘 ‘산아 미안하다’를 속으로 되뇌며 간다.이곳은 좀더 신중하게 결정할 일이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산속 터널을 이용해 피해를 최소화하며 산 기운을  최대한 살려야 했다.
우암산은 지금 도심 속의 섬이 되고 있다. 그리고 각종 시설물과 사람들로 넘쳐 과체중으로 기진맥진해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우암산을 그냥 산처럼 보며 둬야한다. 혹여 어느 날 갑자기 ‘우암산 개발 5개년계획’ 이러한 일련의 발표라도 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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