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4일 밸런타인데이, 3월14일 화이트데이가 지났다. 이런 날이 있어 초콜릿과 사탕을 통해 공식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예전 같으면 상사병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이젠 사랑으로 남몰래 애태우지 않아도 된다. 사랑을 얻기 위한 행위가 비극으로 끝나면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가슴 속에 묻어두고 살아야만 했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양반집 규수였던 황진이는 17세 때 같은 마을의 짝사랑하던 총각이 상사병으로 죽자 기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황진이는 그녀를 사모한 총각의 속을 끓게 한 장본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기생이 된 뒤에도 무수히 많은 양반들의 애간장을 녹인 당대의 최고 미인이자 풍류적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와는 한 세대가 지난 시대에 살아온 사람이지만 대학생들로부터 초콜릿과 사탕을 그 때마다 받는다. 사랑의 고백 따위와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받는 순간 기분이 좋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주고 관심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멋있게 포장된 사탕 바구니나 초콜릿 상자를 들고 희희낙락하는 젊은이들을 보고 어른들은 철없는 아이들의 왜곡된 행동이라고 생각하거나 사탕장사에게 좋은 일 하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면 안된다고 배워온 사람들이기에 더욱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숨겨온 것이 크면 클 수록 그것이 화근이 돼 홧병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현실세계 속에서는 그것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면 상사병이 된다. 황진이 역시 많은 남자들을 울렸지만 자신도 한 남자를 사랑하며 가슴 졸인 상사병 환자였음을 그녀의 시조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동짓날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운 님 오시거든 구비구비 펴리라” 라는 시조가 그것이다. 긴 겨울밤의 한 자락을 잘라내어 이불 속에 모아 두었다가 얼운 님(그리운 님) 오시는 날에 펼쳐서 님과 함께 보내는 아쉬운 짧은 밤을 길게 늘려보고 싶어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절세 미인 황진이의 간절한 심정을 표현한 이 애닮은 시가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어 심금을 울리는 시가 된 것이다.

요즘의 밸런타인데이처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쉬웠다면 황진이가 그렇게 좋은 시를 남길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사모한 화담 서경덕이 쉽게 황진이와의 사랑에 빠졌다면 숭고한 사랑이 오늘날까지 회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녀간의 사랑은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간절함이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길면 좋을 사랑이 수명 짧은 사랑으로 끝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목적을 이루지 못한 짝사랑 또는 첫사랑을 찾아 헤매는 이유, 또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목말라하는 이유가 바로 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랑의 수명은 이리도 짧은 것인가. 즉 왜 사랑이 목적을 이루면 권태에 빠지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남녀간의 사랑은 결국 색(色)을 좇기 때문이다. 색(色)이라는 속성 자체가 “색(色)다른 것” 즉 이색적(異色的)인 것을 좇기 때문이다.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를 맞아 때론 초콜릿과 사탕으로 때론 장미꽃으로, 때론 목걸이와 반지로, 때론 진한 애정의 편지나 속삭임으로 끊임없이 색다르게 표현되어질 때 내 주변에 늘 머무른 사랑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사랑은 유치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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