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연하의 미모의 아내를 취하느라 갖은 노력을 다했던 Y씨는 정작 결혼 이후 아내의 속을 무척이나 썩였다. 다니던 직장은 1년이 멀다할 정도로 자주 바뀌었고, 끝내는 조직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후 개인사업에 뛰어들어 남 좋은 일만 하다 소위 백수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80을 바라보는 일본인 Y씨의 고급 백수의 생활은 화려했다. 40여 년 전에 이미 싱글 골프를 할 정도로, 골프에 미친 그는 골프장 옆에 집을 얻어 365일 골프만 치기도 했다.

아내의 경제력 덕에 생활이 여유로왔던 그는 자신이 전공한 문학(시)을 살리겠노라며 국내 및 외국여행을 즐기며 장기출타를 하는 등 가정생활에는 전혀 관여치 않았다.

그 와중에 더러 바람을 피우다 덜미가 잡혀 평생 아내와의 불화의 씨를 던져 주었다.
한국을 유난히 좋아한 그는 당시 한국을 멸시하던 타 일본인과는 달리 자신들의 조상이 한국인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한국통이었다.

이런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Y씨의 부인은 한국에게 남편을 빼앗겨버려 한국이라면 이가 갈린다며 무조건 한국과 한국인을 싫어했고 아울러 한국을 좋아하는 남편도 미워했다. Y씨의 부인은 불행한 청춘을 보내며 남편과 이혼을 하려다가도 ‘그놈의 편지(남편이 보내던 예술적인 시와 글)’ 한 장 때문에 속고 또 속아왔다 했다.

 그렇게 썩인 속이 결국 위암이 돼 위절제 수술을 받게했다. 그러던 중 Y씨가 독학으로 터득한 한국어 실력이 늘면서 일본의 한 공민관에 한국어 강좌를 개강하면서 인생이 역전됐다. 한국어 강사로서의 경력 덕분에 그리도 원하던 한국에서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그의 나이 60에 한국대학의 일본어 교수로서 채용되는 바람에 무려 10여년간 원어민 교수로서 일했었다.

젊은 시절의 유랑과 방탕(?)생활을 접고 착실한 직장생활을 무려 10여년이나 한국에서 할 줄 그누가 알았겠는가. 아내의 잔소리가 싫어 역마살 낀 사내처럼 돌아다녔었건만 한국에 정착한 후로 아내와도 관계가 좋아졌고 가부장으로서의 권위와 체면도 되찾고 신접생활처럼 흥분된 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가족과 아내의 소중함을 새삼 알게 된 Y씨는 철들자 이별이라더니 일본 귀국후 어느덧 할아버지가 돼 지팡이 신세를 지게됐고, 부인은 유방암에 담낭암까지 70이 넘는 고령에 2번이나 수술을 받는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

자유분방한 삶으로 부인의 간병을 지팡이 짚고 다니면서 감내해낼 수 있을까 의문을 품었지만 과거 아내에 대한 자신의 빚을 갚기라도 하듯, 집에서 병원까지 3번 버스를 갈아타며 2시간씩 걸리는 거리를 아내의 저녁식사 수발을 위해 8개월째 하고있다.

그 와중에 자신의 고관절은 뒤틀려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도 그는 아내 곁에서 그저 회복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벌써 수술 후 감염후유증으로 한쪽눈을 실명 한 부인은 그 곱던 미모는 어디가고 호호백발 할머니가 돼 우울증에 시달리며 감정없는 할머니 인형처럼 돼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오늘도 그는 부인의 목숨을 위해 열심히 격려의 말을 준비하고, 할머니의 웃음을 되돌리려 유머를 준비하고 있다. “수고했어, 잘했어!” “역시 당신이 최고야” “빨리 일어나 당신이 좋아하는 한국 찜질방 가야지” 이젠 지치지 않았나 물어보니 그는 “당연이 할일을 하는 것이다. 아내란 원래는 남이었는데 부모의 간병과는 다르다. 내 아내가 나보다 먼저 간다는 것은 생각도 안해봤다.

내뼈가 부러져도 나는 아내를 살리겠다. 아무리 악처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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