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닐곱 살이었던 늦은 여름이었다.

동네 어귀에 고구마장사가 왔다. “밤고구마가 1관에 삼십원…”
고구마가 너무 먹고 싶었던 우리는 어머니를 졸라 허락을 받았다.
“ 저 자라 팔아 사먹든지…” 

양동이 속에 있던 자라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병중에 있는 아버지를 위해 보양이라도 하라며 고향어른들이 잡아오신 자라였다. 어머니는 자꾸 졸라대는 우리가 귀찮아 던지듯 하신 한마디였는데 철없는 우리는 곧 작당해 실행에 옮겼다.

그걸 들고 중앙공원으로 갔던 것이다. 나와 위로 누이 둘 그리고 청천에서 온 이종사촌형 이렇게 넷이었다.

모두 초등학교에 재학중인 꾀지지한 달동네 아이 넷은 중앙공원 한가운데서실로 묶어 작대기에 매단 자라를 들고 이렇게 외쳤다.
“자라 사유∼야?…” 

제일 어린 나에게 자라를 들고 애처롭게 외치게 한 누이들의 작전은 성공이었다. 측은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한 아주머니는 내게 25원을 들려주었다.

나는 다시 한번 애처롭게 외쳤다.
“오원 더 줘유.”
고구마 1관이 30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40년 세월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 날 중앙공원에서의 그 사건이 이리도 선명히 남아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것은 아마도 천년 고도의 아름다운 공원모습과 곤궁했던 시절의 그 절박함 등이 빚어낸 정서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에게 중앙공원은 그러한 곳이다.
부드러운 흙 땅위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들던 곳.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다.

노인들은 모여 적벽가 한 대목을 뽑거나 고전에 얽힌 만담을 나누고, 공원전속사진사들은 “깎꿍”하며 아이들을 어르며 돌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은 가끔 시민관에서 영화를 본 후에 공원당 냄비우동이나 감천당 팥께끼를 먹기도 했다.

 천년 역사를 굽어보던 터줏대감 압각수에 기세 찬란했던 충청병영의 병마절도사 영문. 그 뿐이랴 공원은 청주의 비림(碑林)이었다. 임진란 당시 청주성 탈환의 주역이었던 중봉 조헌 선생의 기적비를 비롯해 영규대사의 기적비, 의병장 한봉수 선생의 송공비...

이러한 이 유서 깊은 공원이 지금 신음하고 있다. 고성방가에 진동하는 술 냄새 그리고 밤이면 금새 우범지역이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나는 그 이유 중에 하나로 공원을 덮고있는 저 거대한 시멘트덩어리를 꼽는다. 천년 고도의 저 부드러운 흙 땅을 덮었을 때, 그때 공원의 성스러운 기운도 사라졌다.

수목들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여름 그늘은 더 이상 시원하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세게 부는 날은 시멘트 먼지가루에 눈을 뜰 수가 없다. 일관성 없고 세련되지 못한 공원 조경사업도 못마땅하다.

밤낮으로 술에 취해 공원을 배회하며 악명을 떨치는 몇몇 노숙자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도 문제려니와  수상한 몸짓으로 호시탐탐 노인들을 주시하고 있는 일련의 여인들도 색출 해 내야한다. 도시공원은 지역문화의 발원이며 시민정서의 청정지대인 참 그늘이 돼야 한다.

차제에 일제 식 표기인 이 중앙이라는 이름도 바꿀 수는 없을까.
망선루도 옮겨왔으니 지척에 있는 청주목 동헌을 한데 묶어 터를 넓히고‘관아공원’이라 이름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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