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 교수의 풍수칼럼] 신라 천년고도, 월성 왕궁터
[김정인 교수의 풍수칼럼] 신라 천년고도, 월성 왕궁터
  • 충청매일
  • 승인 2022.01.1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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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대 경영학과

신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을 통일하여 통일신라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신라는 삼국통일 후 300 년을 넘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신라의 왕궁이 있던 곳은 금성이었는데 반달 모양의 월성으로 왕궁을 옮겼다. 그곳은 일찍이 석탈해가 토함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반월성에 자리 잡아 2대 왕, 유리왕의 사위가 되고 명당의 기운으로 신라 4대 왕에 오르기도 한 곳이다.

월성은 백두대간 태백산에서 분기한 낙동정맥이 남쪽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북서진하면서 산으로 둘러싸인 경주의 대분지에 반달 모양으로 솟아오른 낮은 언덕이다. 남쪽으로는 남천이 흐르면서 자연 성벽을 이루고 북쪽으로는 해저를 파고 언덕을 쌓아 천혜의 요새를 이룬다.

이곳에 자리 잡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통일왕국의 태평성대를 누리며 문화부흥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곳은 그 형태가 반달 모양이라 반월성이라고 불렀다. 반월형(半月形)의 터는 해와 더불어 달이 우주의 운행과 인간 세상의 기본 질서를 상징하듯 풍수지리에서 반달 터를 길지로 여긴다. 반달 터가 개인의 집터나 마을 자리뿐 아니라 도읍지로서 제일로 손꼽혔다. 백제 부여의 반월성이나 고구려 도읍지 평양의 반월성 등도 같은 이치였다. 반월형에는 모두 반달이 온달이 되어가듯 국운이 날로 융성해지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반월성의 터는 때가 되면 전성기를 이루지만 다시 그믐달로 넘어가기 때문에 그 영광이 오래도록 유지가 되지는 않는다.

삼국을 통일한 때를 최고의 전성기로 본다면 통일 후에는 그다음을 준비해야 했다. 경주는 통일신라의 동남부에 치우쳐 있었다. 이곳에서 삼국의 영역을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지리적 여건으로 보면 구석진 경주에서 백제나 고구려 지역의 지방호족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55대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고, 56대 경순왕은 나라의 힘이 기울자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바쳤다. 통일 후 신라가 월성에 머무르지 않고 통일영토의 중앙인 충주나 한성으로 수도를 옮겨 통일신라의 국력을 키웠더라면 영토도 넓히고 나라도 오래도록 보존하지 않았을까?

반월형 명당, 달도 차면 기우나니 때가 되면 새로운 터로 확장이 필요했었다. 풍수에서는 자연의 현상에서 해답을 찾는다. 시루형 지형에서는 부를 이루면 고향을 떠나야 그 부를 지속해서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때가 차면 변화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견딜 만큼 춥고, 봄이 오면 만물이 싹트고 자라난다, 여름이 되면 성장을 멈추고 알이 익어가며 가을에는 추수한다. 겨울이 되면 모든 잎을 떨쳐버리고 동면에 들어간다. 음(陰)이 극에 달하면 양(陽)이 시생(始生)하고, 양이 극에 달하면 다시 음이 시생한다. 계절의 순환, 음양의 순환이 자연의 이치인데, 누가 자연의 순환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세월의 흐름을 보고 순리적으로 일이 전개되기를 바란다. 지금이 극에 달했다면 변화를 주어 그다음을 준비하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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