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수십 년 만에 외사촌 오빠를 만났다. 나를 각별히 아껴주시던 분이다. 오빠는 나도 모르는 어릴 적 추억이 새록하니 아기 때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신다. 나도 이미 환갑을 맞았건만, 긴 세월 중 가운데 도막은 뭉턱 잘려 나가고 여전히 서너 살배기로 남아있단다. 신기한 듯 자꾸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신다.

우리는 오빠네 대추 농장으로 갔다. 긴 장대로 툭, 툭, 대추나무 가지를 치니 후두둑하고 대추가 떨어진다. 이런 경험이 처음인 나는 그야말로 대박을 맞은 듯이 대추를 줍느라 허리 아픈 줄도 모르고 눈에 불을 켠다. 반들반들 탱탱하게 여문 빨간 대추가 여기저기 흩어졌다. 생대추를 워낙 좋아하는 나는 소쿠리에 주워 담기도 전에 연신 입으로 손이 간다. 생대추는 아삭아삭하며 자극적이지 않은 은은한 단맛이 좋다. 경쟁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 도시적 욕심이 부푼다. 오뉴월이 되어서야 새잎을 달고 꽃을 맺는 대추나무는 서두르는 법이 없어 양반나무라고 하지 않던가. 별것도 아닌 일에 조급해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바닥엔 이미 쭈글하게 말라 떨어진 놈도 수두룩하다. 탱글탱글하던 대추가 주름진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대추도 나이를 먹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이웃 할머니께서 나오셨다.

“일 년은 빠르고 하루는 지루혀.”

할머니는 오늘의 소일거리가 반가우신 듯 손을 보탠다.

나이만큼 속도계가 올라간다고 아닌게 아니라 요즘들어 나이 때문에 신경이 쓰인다. 요즘은 하루해가 모자랄 정도니 아직은 젊다고 항변하지만 머지않아 나의 미래는 어떨까 생각하면 아뜩하다. 텅 빈 속을 채우지도 못하고 헛나이만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을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눌 때면 우리는 상대방 나이에 민감하다. 서로 나이를 알아야 존대와 하대를 적절히 쓸 수 있고 그래야 실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속담에 ‘나이 덕이나 입자’는 말이 있다. 다른 것으로 남에게 대접받을 만한 것은 없고 나이로나 대접해 달라는 뜻이다. 사람이 얼마나 변변치 않으면 나이를 내세울까만 수직적 사고가 지배적이고 경로사상이 몸에 밴 우리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나이를 따지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이 우선이면 좋겠다. 아랫사람이라고 하대하기 전에 내가 과연 나잇값을 제대로 보여주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겠다. 나이가 들어서도 나잇값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주름살이 늘어도, 걸음이 굼떠도,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도 부끄러워하지 말자, 나이로 행세하지 말고 손아랫사람 대우할 줄 알면 오히려 당당하게 마음의 허리가 펴지지 않겠는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조심스럽다. 사촌 오빠에게 아직도 서너 살배기로 보인다니 민망하지만 어디 가서 나잇값 못 한다 소릴 들을까 염려스럽다. 지혜가 반드시 나이와 함께 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젊어서는 생대추처럼 은은한 단맛을, 나이 들어서는 주름 많은 마른 대추처럼 보기에는 쭈글쭈글해도 그럴수록 갖가지 효능을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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