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그의 목소리가 점점 도드라졌다. 검표원이 승객을 점검하고 내려서자 버스가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선다. 어수선하던 차 안 분위기는 잦아들었지만, 한 가닥 그의 목소리만 나이론 줄처럼 길게 남겨졌다.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 길, 몸이 천근만근이다. 군드러진 몸은 시트에 맡기기로 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할 터이다.

쟁쟁했던 한낮의 태양도 비스듬히 스러지니 어느새 차창엔 승객들의 모습이 선명하다. 멈추지 않는 파도 소리처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칠 줄을 모른다. 곧 멈추겠지.

까무룩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10분도 채 안 되어 안개 걷히듯 의식은 점점 또렷해졌다. 버스는 기흥 휴게소 앞을 달리고 있다. 피곤에 절은 승객을 싣고 충성이라도 하듯 어둠을 가르며 힘차게 달린다. 흥분된 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고 사람들은 무심히 시트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다. 내게만 들리는 걸까? 말을 할까 말까?

아들에게, 사위에게, 딸에게 돌아가며 그는 열심히 지시를 내리는 중이다. 앞으로 다가올 이런저런 상황에 대비해서 다그치기도 또 다짐하기도 한다. 종내는 담당 의사마저 불러세울 판이다. 환자는 내내 별 차도가 없는 듯하다. 중년의 가장은 속이 탄다. 통화내용만으로도 그의 가족관계며 지금의 상황이 어떤 상태인지 모두 알아버리고 말았다. 버스 안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공허한 공유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급함은 사라지고 같은 말만 되풀이다. 창가에 바싹 기대어 통화를 하는지 그의 목소리는 시트와 창 사이를 타고 넘어 나의 귀에 완벽하게 꽂힌다. 그는 승객들이 다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버스 안 그 많은 사람 중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은 없다. 나라도 말을 할까 말까?

버스는 어느새 진천터널을 지나고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15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쇠심줄 같은 그의 목소리는 수위를 넘은 듯했지만 불편한 사람은 없나 보다. 옆에 앉은 남자 승객은 미동도 않고 눈만 감고 있다. 차 안에서 피로를 풀어보겠다던 나의 기대는 버려진 지 오래다. 그의 목소리 권역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다.

“저……, 목소리가 다 들리는데요…….”

참다못한 내가 말을 꺼냈다.

“와이프가 응급실에 있다고요!”

신경질적으로 응수하는 중년의 목소리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나였다. ‘다 알고 있다고요!’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이미 얼어버렸다. 어이없는 상황에 피로 지수가 세제곱이다.

언젠가 에스컬레이터에서 무심코 한 줄 서기를 하지 않았다가 민망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나도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까. 그러고도 어른이랍시고 젊은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둔 적은 없었는지. 아무 곳에서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도 태연한, 나잇값도 못 하는 어른은 아니었을까. 젊은이에게는 철저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한 철없는 어른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지하철역에서 본 한 줄 서기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떠올라 더욱 부끄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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