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양반과 부자들은 장리쌀을 미끼로 고을민들의 손바닥한 농토와 게딱지같은 집들까지 빼앗아 갔다. 그들 중에는 청풍 읍성과 인근에 수십 자락의 땅과 집을 가지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렇게 빼앗은 토지와 집을 양반 부자들은 다시 고을민들에게 세를 받고 빌려주었다. 없는 놈은 죽어라 일을 해도 점점 쪽박을 차고, 있는 놈은 손발을 놀리고 있어도 자고 일어나면 재물이 알아서 쌓였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이 장마당에는 없고 양반이나 부잣집에는 있으니, 사람들은 필요한 것이 생기거나 급전이 필요하면 자연 발걸음이 그리로 향했다. 장꾼들이 없는 장마당은 매매할 물건이 없으니 폐장이나 진배없었다. 그리고 대신 양반집이나 부잣집 마당이 장마당이 되었다. 장터가 그들의 안마당으로 옮겨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이라는 곳이 필요한 물건이 있든 없든 아무나 어정거리다 견물생심이 일거나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 노닥거리다 없던 일도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마당에는 물건이 없고 부잣집 창고에만 쌓여 있으니 매기가 있을 리 없었다.

북진여각의 창고에도 정작 고을민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곡물은 전혀 없었다. 고을민들을 구휼하기 위해 하미를 풀 때 이미 모두 방출한 상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진여각을 더욱 힘들게 만든 것은 한양에서 올라오는 새로운 물산들이었다. 북진을 비롯한 남한강 상류 지역은 산간지대여서 곡물보다는 특산물 생산이 주업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무명은 북진 인근 농민들에게는 요긴한 수입원이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흉년이 계속되어 궁핍한 형편에 농가에서는 삼나무를 길러 짠 무명은 식구들 목숨 줄을 이어주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농가에서 수공업으로 짜던 무명은 한양에서 올라오는 공방 물건들로 인해 폭락하고 말았다. 베는 아낙들이 낮에는 들일을 하고 밤중에 잠을 줄여가며 짰기 때문에 베 한 필을 짜려면 보름 이상이 걸렸다. 자연히 시골에서 짜는 수공품은 품이 많이 들어갔고 생산량도 적어 높은 값을 받았다. 그런데 한양에서 올라오는 공방 베는 품질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값이 저렴했다. 공방 베 값은 수공 베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한양의 공방 베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기 전에는 경강상인들이 질 좋은 남한강 일대의 베를 선점하려고 북진여각에 목을 맸지만 이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농가의 아낙들도 품값은 고사하고 예전의 절반 아래로 떨어진 베를 짜느라 보름씩 밤잠을 설치느니 차라리 며칠만 남의 집 품을 팔아 공방 베를 사서 쓰는 것이 더 편했다. 그러다보니 이젠 농가에서도 베를 짜는 집이 점점 줄어들었다.

북진여각으로서는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북진은 곡물보다는 특산물이 상권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특산물 중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물산이 무명과 명주였다. 북진여각 또한 가가호호 농민들이 가지고 나오는 수공품과 임산물들을 바탕으로 지금의 상권을 이룬 셈이었다. 경강상인들이 가지고 오는 공방 물품은 베뿐이 아니라 임산물을 제외한 일상용품들은 북진에서 생산되는 물품과 겹치는 것이 많았다. 당연히 가격은 경쟁이 되지 않았다. 북진여각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최풍원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북진여각을 운영해오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상권을 유지할 수 없음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제껏 북진여각의 바탕이 되어주었던 고을민들을 하루아침에 저버리고 경강상인들로부터 한양 공방의 물량을 받아들이는 것도 상도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면 북진여각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겨우 목숨을 지탱해나가고 있는 고을민들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지금 북진여각의 상황으로는 고을민만 생각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후안무치한 배신행위이기는 했지만 정리만을 따지며 연연해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급변하고 있었다. 북진여각이 살아남으려면 고을민들을 버리고 한양의 값싸고 다양한 물산을 받아들여야 했다. 변화의 물결을 타지 않고는 북진여각에 닥친 난관을 넘어갈 수가 없었다.

서로에게 피해를 줄이며 상생할 수 있는 대안이 있으면 그보다 묘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한양의 하미를 사들여 농민들에게 장기 저리로 빌려주고 한양의 공방에서도 만들 수 없는 북진에서만 할 수 있는 특산품을 구하거나 만들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북진여각의 배로 싣고 가 한양 삼개에 문을 연 봉화수의 상전에서 직판을 하면 지금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만 되면 장기로 빌려준 하미에서 생겨난 손해나 떼어먹고 도망가 생긴 손해 부분도 보충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도중회 객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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