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 교수의 풍수칼럼] 조선의 막을 내린 덕수궁
[김정인 교수의 풍수칼럼] 조선의 막을 내린 덕수궁
  • 충청매일
  • 승인 2020.11.1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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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대 경영학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가장 명당지역을 찾아 궁전을 지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왕권 다툼이 커지자 2대 왕 정종은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그러나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잡은 3대 왕 태종은 다시 한양에 창덕궁을 지어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 후 태종은 왕권을 세종에게 물러주고 창덕궁 동쪽에 수강궁을 지어 이어 했다.

세종은 큰 정치를 펴기를 위하여는 좁은 창덕궁보다는 넓은 경복궁이 좋다 하여 주로 경복궁에 머물렀다. 이후에도 궁궐터에 대한 논쟁은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세종은 이를 연구케 하고 직접 신하들과 함께 현장을 돌아보면서 명당논쟁을 잠재웠다. 세종은 경복궁 경회루 옆에 집현전을 두어 이곳에서 한글을 창제했다.

성종 대에 와서 3명의 대비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해 창경궁을 지었다. 이곳이 대비와 후궁들의 거처가 되면서 여러 왕자가 창경궁에서 태어났고 왕들도 이곳에 즐겨 머물렀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모두 불에 타자 선조가 월산 대군의 옛 사저에 와서 임시로 머물렀다. 그 후 을미사변으로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자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을 하러 갔다. 일본과 러시아와의 협상으로 1년 만에 고종은 경복궁으로 가지 못하고 비상시 임시 궁궐로 사용하던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고종이 이곳에 머무르자 전각을 짓기 시작했는데 동향의 터에 남향으로 궁전을 지었다. 그래서 중화전, 석조전 모두 남향으로 건축했는데, 궁전 뒤가 허하게 비어 있다. 뒤에는 작은 동산이 있었으나 그마저 다 헐어버렸다. 주산이 무너졌으니 근본이 무너진 것이고, 배경이 없는 것이니 어디에서 힘을 받을 것인가? 풍수에서는 배산임수가 근본인데 배산이 없으니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 고종이 순종에게 왕권을 양위하고 순종은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 했으나, 3년을 버티지 못하고 조선왕조는 518년으로 이곳에서 막을 내렸다.

일본은 고종을 경복궁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왜 덕수궁으로 가도록 했을까? 철저한 풍수적 배경에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든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5대 왕궁중 주산이 가장 약한 곳이 덕수궁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명당의 기운을 끊기 위하여 철저히 풍수를 이용했다. 명산의 봉우리마다 쇠말뚝을 박았고 왕궁의 기운을 차단하고자 왕궁 파괴 활동을 시도했다. 경복궁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어 지휘소로 활용했고, 바위 맥이 있는 창경궁에는 동물원을 만들어 시민에게 개방해 바위의 기운을 흩트렸고, 경희궁에는 학교를 지어 바위의 기운을 분산시켰다. 덕수궁 뒤에 있는 작은 동산은 허물어 버렸다.

그러나 대한민국 수립 후 수도는 서울이었고, 경복궁 뒤에 청와대가 자리 잡았다. 대한민국은 가장 빠른 기간 내 세계 경제 10대국으로 성장했다. 최근 서울로 입구 집중 현상으로 주요 관공서를 지방으로 이전하고 있다. 국가기관은 백년지대계, 국가의 장래를 결정하는 주요한 일을 하는 기관이다.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더라고 관공서 입지는 주산이 든든한 곳에 자리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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