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장인어른은 먼저 주막을 잡아 쉬시지요. 수참 일은 제가 알아서 마무리 하고 뒤따라가겠습니다.”

“그러게!”

최풍원이 달박달박 사람들이 들끓는 집을 지나쳐 한적하기만 한 주막집을 골라 마당을 들어섰다.

“어서 오시구래!”

주막집 삽작문을 들어서자 늙은 주모가 시큰둥하게 맞이했다.

“어찌 이래 썰렁한가?“

최풍원이 주모에게 하대했다.

“낯짝에 고랑 패이고 대갈박이 허얘지니 이 장사도 못해 먹겄소.”

“내 보기에도 그렇소. 장사를 하려면 아무리 세월이 가도 단장을 해야지, 그리 내방쳐두면 누가 물건을 건드리기나 하겠소?”

“언 놈들이 찾아들기나 해야지 단장을 하든지 말든지 허지. 그래도 오동통하게 젊어서는 이놈저 놈 꽤 붙었다우.”

“호박꽃에도 벌나비가 꼬이는 법인데, 왕년에 한가닥 안한 놈 있소?”

“세월아 이놈아, 가려면 네놈이나 갈 것이지…… 아까운 내 청춘은 왜 끌고 갔너냐…….”

늙은 주모가 아예 타령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주모 목소리 들어보니 잘 빚은 술도 맛 떨어지겠소?”

“뱃놈아 뱃놈아, 의리 없는 뱃놈아…… 젊어선 내 좋다고 그리 달려들 더니만…… 늙어서 고목되니 잡새 한 마리 없구나…….”

“그만 청승 떨고 술이나 한 상 내오구려!”

목소리까지 퇴기 냄새가 풀풀 나는 주모가 청승을 떨다말고 최풍원의 핀잔에 부엌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그랬다. ‘세월에는 장사 없다’고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변하기 마련이었다. 조정에서 준 특권을 권세로 코흘리개도 할 수 있는 장사를 하던 시전이 혁파된 것도 그들이 변화에 재빠르게 대처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전 상인들은 수백 년 동안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대주고 그 대가로 관아의 비호 아래 금난전권의 특혜를 받아 사상인들은 난전을 펼 수 없도록 함으로써 독점적인 장사를 해왔다. 그러나 한양의 인구가 이십여만 명에 이르자 소비도시인 한양에서 필요로 하는 생필품 수효 또한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이제까지 한양 사람들이 먹는 대부분의 곡물은 조선 팔도를 배로 다니며 장사를 하는 경강상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경강상인들은 물산을 매매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운송비만 받고 모든 물산은 시전 상인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야 했다. 경강상인들은 벼 한 섬, 베 한 필 조차도 마음대로 매매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경강상인들의 불만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에도 이미 가내수공업과 개인 공방의 발달로 물품 생산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개인들 사이에서는 시전의 눈을 피해 암암리에 밀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처럼 상술이 급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도 봉건적인 장사 행태만 고수하고 있던 시전들은 더 이상 그 명맥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틈을 타고 선상업자에 불과하던 경강상인들은 봉건적인 시전의 상업체제에 반발하여 ‘도가’라는 독특한 장사 방법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선박을 이용하여 생산지로 직접 찾아가 도거리를 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배로 옮겨 한강변의 창고에 쌓아 보관하였다가 가격이 오르면 장안의 시전상인들에게 공급하거나, 암암리에 직접 소비자에게 판매를 했다. 특히 신해통공 이후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에게 특혜를 주었던 독점판매권이 전면적으로 폐지되어 도성 내 모든 시전들이 자유로운 상행위가 가능해지자 한양을 배경으로 경강상인들의 상업 활동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더구나 선상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경강상인들도 한강가에 물산을 판매하는 점포를 열게 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상인 조합인 도가를 만들어 상권을 넓히고 자본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이미 조세운송과 선상업을 통해 거대자본을 축적하고 있던 경강상인들은 생산지와 신속하게 연결될 수 있는 운송수단을 발판으로 팔도 곳곳을 누비며 곡물과 소금을 매점함으로써 한양의 육의전을 제외한 상업 활동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경강상인들 중에는 대궐의 권력과 결탁하여 이를 뒷배로 장사에 이용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러한 사상도가들의 발 빠른 행보는 한양의 시전상인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게 되고 이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났다. 경강상인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시류를 발 빠르게 읽고 지역의 생산지나 장마당에 직접 나가거나 여각의 객주들을 통해 매점, 즉 ‘사재기’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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