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꽤나 오래 전이었다. 심봉수가 사방팔방 쏘다니며 발품을 팔아 모은 돈으로 새끼 목상을 막 시작했던 그 무렵이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목상을 하려면 많은 목돈이 필요한지라 턱도 없이 모자란 돈으로는 번듯한 장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목상이라고 시작한 것이 산판에서 나오는 파치들을 모아 파는 일이었다. 일테면 늘르리 큰집을 짓는데 쓰이는 질 좋은 나무는 뗏목으로 엮어져 강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고, 삼 칸 집이라도 지을만한 언간한 나무도 이리저리 팔려나가고 나면 산판에는 허드레 잡목과 아름드리나무에서 쳐낸 가지들만 남았다. 젊은 시절 심 객주가 산판에서 목상을 시작하며 한 일은 그런 나무들을 다시 모아 손질해서 파는 일이었다. 굽은 나무나 벌채를 하다 상처 난 나무지만 누옥이라도 지을 만한 목재를 고르고, 쳐낸 가지지만 서까래로라도 쓸 만한 나무는 추려내고, 그마저도 쓸모가 없는 것은 땔감으로 만들어 팔았다. 떼를 팔고 사는 목상들처럼 큰 거래는 아니었지만 심 객주는 새끼 목상을 하며 짭짤하게 번 돈으로 재산을 점점 불릴 수 있었다.

“성님, 김주태가 한다는 짓거리가 뭐래유?”

“그 누무 새끼는 맨날 여우새끼마냥 살살 뒷구멍으로 사람 등을 친다니께. 나이를 처먹었어도 예나 지금이나 하는 짓거리가 변하질 않어. 야비한 놈!”

성두봉의 물음에에는 대답도 않고 심봉수는 김주태 욕부터 내갈겼다.

장사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서로 간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었다. 여러 도리가 있겠지만 장사를 하며 그중 중요한 것은 남의 밥그릇을 빼앗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청풍도가 김주태는 그런 짓거리를 여사로 했다. 김주태가 영춘 용진나루에 올라와 나무장사를 하며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이간질이었다. 그때 영춘에는 토박이 목상이 서넛 가량 있었다. 물론 충주나 한양에서 올라오는 목상도 있었지만, 그들은 벌채된 통나무가 용진나루에 집산되는 성수기 때만 올라와 두어 달 주막에 머물며 자기가 필요로 하는 나무를 사는 구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외방 목상들은 토박이 목상들이 산주나 산판에서 사놓은 통나무를 구입하여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장소까지 운반해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영월 동강 깊은 산중 산판에서 벌채된 통나무를 산주에게 영춘 목상들이 사들여 골안 뗏꾼들을 부려 용진나루까지 운반해오고, 용진 목상들은 외지에서 온 목상들에게 이를 넘기는 방식이었다. 이때 골안 뗏꾼의 공가는 용진 목상이 치루고, 남한강을 따라 대처나 한양으로 가는 큰 뗏꾼의 공가는 외방 목상들이 지불을 해주었다. 뗏꾼들은 목상이 원하는 장소까지 떼를 몰아다주고 그 자리에서 공가를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만약 떼를 몰고 가다 나무를 잃거나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면 공가는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김주태가 타관사람이면서 용진나루에 나타나 한 일은 산판과 토박이 목상, 그리고 외방 목상들 사이에 끼어들어 갈라놓는 짓거리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토박이 목상과 골안 뗏꾼을 외방목상과 큰 뗏꾼을 서로 불신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종당에는 산주와 목산, 뗏꾼들이 서로 물고 싸우다보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해놓고는 각자에게 사탕발림을 하여 산판과 목상, 그리고 뗏꾼들을 자신의 수중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제 멋대로 벌채된 나무 값은 똥값으로 깎고, 목상들에게 파는 값은 금값을 쳐서 받고, 목숨을 내놓고 떼를 몰고가는 뗏꾼들 공가는 후려쳤다. 그렇게 남의 밥그릇을 빼앗아 돈을 챙겨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물론 김주태가 화수분 같던 영춘 목상을 그만두고 떠난 것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심봉수가 새끼 목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 객주가 처음 목상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산판에서 파치 나무는 거저 얻다시피 했다. 외려 산주들은 산판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것이 고맙다며 파치 더미 속에 슬쩍슬쩍 좋은 나무를 넣어주기도 했다. 그런 나무를 팔아 생기는 돈도 쏠쏠했었다. 그런데 김주태가 올라와 산판 물을 흐려놓으면서 그런 일은 생길 수가 없었다. 파치 나무를 처리하는 자잘한 일까지 간섭하며 돈을 받아 챙겼다. 심봉수 역시 김주태에게 예전보다 서너 배는 늘어난 돈을 꼬박꼬박 세로 바치며 허드레 나무 장사를 했었다. 그렇게 아귀처럼 산판 돈을 삼키던 김주태가 꽃방석 같은 나무장사를 버리고 영춘을 떠난 것은 비명횡사를 당할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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